㉔ 화성 용주사

열한 살 소년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 죽음은 서서히 진행된, 예견된 죽음이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뒤주에서 죽어가는 8일 동안 식지 않는 불구덩이에서 살았다. 세자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은 할아버지로 그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조선의 왕이었다. 손자는 힘을 다해 아버지의 죽음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할아버지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 후, 2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조선의 22대 왕 정조였다. 1762년 그해 열한 살 소년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조는 꿈을 꾸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날아가는, 예사롭지 않은 꿈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실을 맺는 걸 뜻했던 걸까. 공교롭게 사도세자 역시 정조의 태몽으로 용이 여의주를 물고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정조는 자신의 꿈을 따라 절 이름을 지었다. 이 절이 용주사(龍珠寺)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왕이 절 이름을 짓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현 화성시)으로 옮긴 후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지었다.

01
용주사 입구

꼼꼼하고 치밀한 정조가, 더구나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용주사의 설계를 다른 사람에게만 맡겨두었을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뜻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용주사는 절과 대갓집과 궁궐의 요소가 섞여 대갓집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궁궐이 나오는 것 같고 그러다 어느새 눈앞에 부처를 모신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용주사처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건물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고 각 영역이 간결하게 구획되어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깔끔하며 빈틈없다. 그래서 절을 걷고 있으면 빈 곳 없이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02
용주사 천보루

일반적인 절과 다른 용주사의 특징은 건물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절에서는 흔히 만세루라고 부르는 건물을 이곳에서는 천보루(天保樓)라고 이름 지었다. 천보는‘시경’에 나오는 시로 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천보루 현판은 천보루 위쪽에 걸려있어 용주사에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볼 수 있다. 또한 천보루는 좌우대칭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의 중앙에 자리 잡아 더욱 권위가 넘친다. 대웅보전으로 가려면 천보루 아래를 지나야 하는데 마치 왕을 받드는 것 같다. 천보루의 안쪽에는 홍제루(弘濟樓)라는 현판이 붙었다. 홍제루는 후대에 붙은 이름으로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무리 왕이라고 하더라도 절을 지으려면 신하와 백성을 납득시킬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이 약하면 반발에 부딪혀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렵다. 모두를 설득시켜 반발 없이 동참시킬 수 있는 명분은 다름 아닌 효였다. 효는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충보다 앞섰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것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위한다는 명분 앞에서 보수적인 성리학자라도 쉽게 반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용주사는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효를 행하는 공간이었다.

 

03
용주사 호성전

지금도 절 곳곳에서 효와 관련된 공간과 문화유산을 만난다. 대웅보전 동북쪽에 자리 잡은 호성전은 원래 사도세자를 기리는 사당으로 후에는 사도세자와 정조를 함께 기렸다. 사도세자를 기린다는 점에서 호성전은 부처를 모신 대웅보전만큼 중요하다. 호성전 옆 지장전에는 특별한 벽화가 그려졌다. '불설대부모은중경'에 근거를 둔 외부의 벽화는 아이가 태어나서 독립할 때까지 받은 부모님의 은혜를 그렸다. 내부의 벽에는 부모가 나이 들고 세상을 떠나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가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그중 나이든 부모를 업고 다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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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대부모은중경 경판

정조는 효행을 강조한 <불설대부모은중경>을 높이 평가했다. 부모의 은혜와 효를 다룬 경전이기 때문이다. 책의 중요성과 효용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정조는 이 경전의 경판을 만들어 용주사에 내려주었다. 이 경판의 일부가 용주사 입구에 있는 효행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경판의 그림은 어떻게 조각했는지 모를 정도로 섬세하고 세밀하다. 경판을 만들 때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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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대웅보전

용주사에서 꼼꼼하게 살펴봐야할 건물이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은 용주사 건축 배치의 중심에 있다. 천보루를 지나면서 만나는 대웅보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같은 권위를 드러내며 자리 잡았다.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모습을 만난다. 천장부터 부처의 머리 위에 놓인 닫집, 벽에 걸린 삼세불회도, 세 불상, 이 불상을 받친 큰 받침대인 수미단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벽을 따라 늘어선 불단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말하자면 대웅보전은 치밀하게 설계된 건축물이자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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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불회도와 목조 삼세불 좌상

대웅보전을 더욱 빛내주는 건 삼세불회도다. 그림 위쪽 중앙에 석가모니불, 바라봐서 오른쪽에 약사불, 바라봐서 왼쪽에 아미타불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 불화는 여러 가지 점에서 놀랍다. 부처의 얼굴은 신적인 존재라기보다 사람의 얼굴에 가깝다. 그리고 부처 및 등장인물의 얼굴에는 음영이 보인다. 음영은 불화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보기 드문 표현법이다. 김홍도가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은 이 불화는 부처가 인간 세상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듯하다. 그림에는 정조, 정조의 어머니, 왕비,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글이 쓰였다.

불화 앞에는 목조 삼세불 좌상이 봉안되었다. 삼세불회도처럼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이다. 세 불상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불상을 빨리 만들기 위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아니라 소속 사찰이 다른 세 명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 곳에서 개성이 다른 세 부처를 만난다. 보는 위치에 따라 세 부처의 인상이 미묘하게 달라지는데, 예불을 드리는 낮은 곳에서 볼 때는 근엄한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고 옆에서 보면 미소가 더욱 환해진다.

용주사를 둘러보고 천왕문을 나와 절을 떠나기 전 뒤를 돌아본다. 열한 살 소년은 왕이 되어 아버지의 무덤에 행차할 때마다 이곳에 들려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소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사라지지 않았을까?

07
융릉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은 용주사에서 무척 가깝다. 융릉 곁에는 정조의 무덤인 건릉이 자리 잡았다. 용주사를 봤다면 다음 행선지는 융릉과 건릉이다. 정조는 즉위한 후 아버지의 존호를 사도에서 장헌으로 바꾸고 무덤은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을 높였다. 1789년 무덤을 양주에서 천하의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이름도 현륭원으로 지었다. 그 다음해 무덤 가까운 곳 갈양사가 있던 곳에 용주사를 창건했다. 대한제국 선포 후 장헌세자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무덤 이름도 융릉으로 높였다.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는 오늘도 아들 곁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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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

정조의 무덤인 건릉은 원래 융릉 아래쪽에 있었다. 정조의 왕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건릉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융릉 서쪽으로 무덤을 옮겼다. 건릉으로 가는 길 좌우로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는 든든하게 건릉을 지키는 병사들 같다. 소나무 지대를 통과하면 다음은 참나무들이 이어지는데, 이 나무들도 소나무처럼 쭉쭉 솟았다. 이 숲을 가꾼 조선 사람들의 정성 덕분에 깊은 숲에 들어온 것 같다.

건릉 앞을 걷다보면 정조가 펼쳤던 정책과 그가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오던 머나먼 길이 떠오른다. 한양에서 이곳까지 왕이 행차하기에는 가깝지 않다. 더구나 많은 수행원과 군사와 함께 오는 길이기에 행차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정조는 오히려 이 행차를 적극 활용했다. 효를 부각시켜 민심을 모으고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행차의 당위성을 얻었을 것이다. 열한 살 소년은 뛰어난 왕이 되어 아버지를 만나러 갔고 삶이 다했을 때 비로소 행차를 멈추었다.

09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

용주사와 융릉과 건릉이 있는 화성시와 수원 화성이 있는 수원시에서는 해마다 정조를 기리는 축제를 연다. 화성시의 정조 효 문화제(2023년 10월 7일(토)∼10월 8일(일)), 수원시의 수원화성문화제(2023년 10월 7일(토)∼10월 9일(월))가 그것이다. 다양한 축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그중 가장 주목되는 행사는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이다. 10월 8일부터 9일까지 이틀 동안 서울 창덕궁에서 출발해 수원 화성을 거쳐 화성의 융릉까지 행차한다. 정조의 꿈은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뜻깊은 축제로 우리 곁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글·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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