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포천 왕산사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왕산사. 그래서 주변 산세에 대한 풍수지리적 해석도 유명하다.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왕산사. 그래서 주변 산세에 대한 풍수지리적 해석도 유명하다.

877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 헌강왕이 직접 찾아 격려하고
조선 태조가 왕자의 난 피해 의탁도

포천은 후삼국시대에 궁예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드라마 ‘왕건’을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며 신격화했다고 한다. 그래서 포천에는 미륵신앙이 널리 스며들어있다. 미륵신앙이 오래 전부터 스며있어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이라 한 것인지, 아니면 궁예로 인해 미륵신앙이 스며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이번에는 포천에 자리잡은 미륵신앙의 흔적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포천 불교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막상 전통사찰로 지정된 사찰은 세 곳 정도로 많지 않다. 그만큼 험난한 역사를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의 한 곳이 왕산사(王山寺)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산사는 877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통일신라 헌강왕 시기였는데 왕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 격려할 정도였으니 매우 중요한 절이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 이성계가 1차 왕자의 난으로 왕좌에서 물러나 함흥에서 은둔하고 있을 때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간신히 설득하여 한양으로 모셔 오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이성계가 도로 함흥으로 발길을 돌리던 중에 이 절에 와서 어지러운 심정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이렇게 헌강왕과 태조 이성계가 왔던 절이라 하여 원래는 왕이 방문했던 절이란 뜻으로 왕방사(王訪寺)로 불린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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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사 미륵부처님 친견하러 가는 길. 중간에는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아마도 사라졌던 소원돌이 다시 발견된 자리가 이 근처가 아닐까 싶다.

영험한 미륵부처님 '소원돌' 유명세
돌 안 들리면 염원한 일 이뤄지게돼
한때 분실 후 되찾아 유리장에 모셔

필자가 뵙고자 한 왕산사의 미륵부처님은 1947년 이 사찰을 중창한 청매스님과 깊은 인연이 있다. 당시 퇴락해 가던 절을 찾은 청매스님은 이 절이 영험한 터에 자리잡은 것을 알고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그 기도가 끝나던 날 미륵부처님이 현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현재 왕산사에 전하는 석조미륵불입상이 그때의 미륵부처님이라고도 하고, 혹은 그 모습을 본 따 청매스님이 모신 것이라고도 한다. 정확히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환하게 웃고 계신 모습을 보면 아마도 청매스님이 그 무렵에 조성한 부처님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다리 부분이 절단된 것을 도로 이어붙인 흔적이 있어서 더 오래전 부처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더구나 그 유명한 은진 관촉사의 미륵부처님하고도 많이 닮은 부분이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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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민에 대해 마치 "그거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하며 미소짓는 듯한 미륵부처님.

여하간 이 미륵부처님이 그렇게 영험하시다고 하여 찾아뵈었는데, 이렇게 웃고 계시니 굳이 언제 만들어진 부처님이신지 묻기도 민망해진다. 그저 따라 웃고 싶을 뿐이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힘든만큼 부처님도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래서 혼자 웃고 계신 부처님이 다소 아쉽게 느껴질 때도 없지는 않지만, 이렇게 환하게 웃고 계신 부처님을 보면 "이 친구야, 그거 별거 아니야"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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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 이루어질 때는 들리지 않는다는 ‘소원돌’.
대웅전 들어서면 거대한 후불탱화
극락세계 담은 관경변상도 채워져
법당 앞 청량한 약수도 물맛 일품

이 부처님 옆에는 둥그렇고 매끄런 돌덩이가 하나 유리장에 귀하게 모셔져 있다. 일명 ‘소원돌’이라는 것인데, 소원이 있으면 기도를 하고 이 돌을 들었을 때 돌이 마치 바닥에 붙어 안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한다. 현재의 주지스님이신 법해 스님께서 2001년도에 처음 부임해오셨을 때, 불자들이 모두 미륵불 앞의 이 돌맹이에만 기도를 하는 것 같아 돌맹이를 치웠더니 불자들이 모두 이 돌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심지어 꿈에 이 돌이 나타나기도 했다고 하여 도로 가져다 놓으려 했지만, 왠일인지 돌이 감쪽 같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흰 털복숭이 동물이 나타나 주지스님을 인도하여 지금의 삼성각 인근으로 모시고 갔는데, 그곳에 이 소원돌이 놓여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주워다 다시는 위치를 옮기지 않도록 지금과 같이 유리장을 만들어 모셔놓은 것이라 한다. 유리장 안에 소원돌이 들어가 있지만, 문이 잠겨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유리문을 열고 소원을 빈 다음 그 돌을 들어볼 수 있다. 필자도 소원을 빌고 돌을 들어봤는데 아쉽게도 별 문제없이 들려서 다소 실망하긴 했다. 아마 필자의 소원이 너무 큰 것이었는가 보다. 인디언 기우제라는 말도 있지만, 원래 소원이 잘 이루어지는 비결은 이루어질만한 일을 소원하는 것이다. 아마 마음을 비우고 다음에는 이루어질만한 소원을 빌면 돌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왕산사의 또하나의 보물은 대웅전 안에 법해스님이 부임하신 후에 조성한 후불탱화이다. 보통 후불탱화는 불상 뒤편에 기둥과 기둥 사이의 한 칸에 가득 채워지는 크기로 그려지는데, 왕산사 후불탱화는 뒷면 벽면이 전부 하나의 불화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스님은 이 후불탱화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후불탱화라고 설명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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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큰 후불탱화일 것이라는 왕산사의 자랑인 대웅전 후불탱화 <관경변상도>. 대웅전은 비로자나, 석가, 약사,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관촉사 미륵불 닮은 용화사 미륵불
원형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될수도
총탄자국 탓 향토유적 지정 아쉬워

이렇게 큰 불화가 가능한 이유는 후불탱화가 극락세계를 묘사한 관경변상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후불탱화가 부처님의 설법 장면만 묘사한 반면, 이 그림은 극락세계의 전체 모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큰 화면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법당의 현판은 대웅전인데, 불단 위에 모셔진 부처님을 보면 비로자나부처님을 중심으로 약사부처님과 석가부처님의 3존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후불탱화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도이니 그만큼 불교의 종합적인 체계가 이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왕산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포인트는 법당 앞으로 솟아난 약수다. 대웅전의 기단부 한켠에 동굴처럼 만들어놓은 부분이 보이는데, 여기서 약수가 솟아나고 있다. 약수 나오는 절이야 많지만, 유난히 물맛이 좋다. 더운 여름이 다가오는만큼 왕산사를 방문하신 분이라면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가실 것을 추천드린다.

왕산사에서 친견한 살인미소의 미륵부처님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구읍리의 용화사를 찾는다. 항상 개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 법당 안에 모셔진 미륵불을 뵐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운이 좋다면 포천의 귀한 미륵부처님을 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왕산사에서 소원돌에 빈 소원은 어떨지 모르지만, 운 좋게도 용화사의 미륵부처님은 이날 친견할 수 있어 소원이 하나 이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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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사 대웅전 아래의 약수

이 부처님이 중요한 이유는 은진 관촉사의 국보인 거대한 미륵부처님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왕산사 부처님도 그렇고, 부여 대조사의 석조보살입상이나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도 관촉사 미륵불과 닮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닮은 것으로 보자면 아마도 이 용화사 부처님이 아마도 가장 닮았을 것이다. 특히나 기록에 의하면 관촉사 미륵불의 보관에는 화불, 즉 작은 불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관 부분이 떨어져 나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용화사 미륵부처님은 관촉사 미륵불처럼 높게 솟은 보관에 화불이 아직도 새겨져 있어서 관촉사 미륵불의 원형을 추정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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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구읍리 용화사 미륵석불. 향토유적 6호. 높이 4.4m의 대형 석불상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는 구읍리에 두 분의 미륵석불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두 분을 모시고 여미륵, 남미륵 등으로 부르는 예는 전국적으로 몇 군데서 확인이 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 대부분 불상 자체는 돌기둥처럼 추상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제대로 갖추어진 쌍불로서의 미륵불은 드문 경우다. 아쉽게도 또 한 구의 미륵불은 현재는 사라진 상태라고 한다. 이 부처님은 군데군데 총탄 자국이 있어 보수를 해놓은 상태인데, 그래서 그런지 아직 향토유적으로만 지정되어 있다. 앞으로 면밀히 연구되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석불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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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신북리조트 스프링폴 온천 입구

두 분 미륵부처님의 기운을 받아 마음이 휴식을 취했다면, 다음으로는 가벼운 마음으로 신북면에 위치한 온천 스프링폴에서 몸의 휴식을 취해보는 것도 좋다. 일요일이긴 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온천을 찾았다. 깨끗한 시설에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예전에는 온천 하면 온양이었는데, 이제는 포천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포천은 갈비도 유명하고, 막걸리도 유명하다. 운전을 해서 간 탓에 막걸리는 마시지 못했지만, 그래도 갈비쯤은 먹어줘야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갈비생각’도 추천드릴 수 있고, 그보다 간단한 식사를 원한다면 함병헌 김치말이국수나 욕쟁이 할머니집의 시래기정식 등도 추천드리고 싶다.

글·사진=주수완 우석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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