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조셉 도레(Joseph Dore) 대주교님을 뵈었다. 안식년을 마무리하며 코로나로 인해 뵙지 못했던 은사님들도 뵙고, 파리가톨릭대학교 연구팀과 공동 연구 계획을 상의하기 위해서 파리를 방문하던 차였다. 7년 전 국제학술대회 때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셨던 대주교님은 필자를 보자마자 이태원 참사에 관해 물으셨고, 남북의 고조된 갈등 관계를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셨다. 현재 프랑스 교회를 강타하고 있는 성직자 성범죄 사건, 세계주교시노드의 주제인 시노달리타스 등 다양한 주제를 나누던 중, ‘부성(父性)’으로 화제가 옮겨졌다. 순전히 생물학적 차원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을 넘어서는 ‘부성과 모성’이 있음을 강조하시며, 오늘날 부성이 크게 위기에 처해있음을 지적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고유한 이미지 그리고 아버지로서 수행하는 고유한 역할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지적이었다.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에서 모성에 비해 부성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IMF 이후 과거의 권위적인 이미지가 사라지고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더 두드러지는 오늘이다.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래 왔는지 눈물이 말해 준다. 점점 멀어져 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인순이 님의 ‘아버지’ 노래 가사는 한국 사회에서 부성의 현주소를 가슴 저미게 표현해 주는 듯하다.

필자의 경우 수개월 전 모친을 여읜 다음 부친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집안과 자녀를 향한 넓고 깊은 부친의 마음 씀씀이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동안 잊고 살아왔던 부성의 중요성과 그 위대함을 절감하고 있다.

부성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부성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찾기보다, 아버지가 사회와 가정에서 지녀 온 이미지와 수행해 온 구체적인 일을 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젖을 입에 물리고 아기를 품에 안으며 달래고 어르는 어머니의 따뜻하고 돌보는 모습과는 달리, 부성이란 묵묵히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든든한, 외부의 위협과 갖가지 위험에서 가족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끝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늘 주위를 살피며 가족들의 안위를 돌보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오늘 몹시 그리운 이유는 이태원 참사나 남북 관계의 고조된 위기, 그 밖의 수많은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사건들과 현실 앞에서 슬퍼하고 아파하며 두려움에 휩싸인 국민을 끝까지 돌보고 보호해주며 책임을 질, 든든하게 신뢰를 둘 만한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절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가족 중에 상처 입은 구성원이 있다면 가장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누군가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책임을 절감하며 상처 입은 구성원을 돌보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정치는 국민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서로 싸우고 자기 이익만 챙기며, 사건이 생겼을 때 남의 탓으로만 돌리며 오직 위기만 모면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아닌, 아버지의 든든함을 느끼도록 하는 책임 있는 모습일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또한 부주의나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누군가를 탓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본래 역할인 가정을 끝까지 돌보고 보호해주는 분이 아버지인 것처럼 그런 부성을 느끼도록 하는 정치인을 바란다. 진정한 신뢰는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획득되듯이, 상처 입은 국민을 위해 실제로 자기 삶을 바치는 정치인을 바란다.

도레 대주교님은 어떤 강연에서 현대인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고 한다. "이 시대에 우리는 아직도 영혼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혹은 양심을? 최소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누가 그 마음을 돌봅니까?" 그 답은 다양할 것이다. 종교, 철학, 사회, 가정 등. 그리고 그 답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정치가 아닐까. 정치가 정작 돌보아야 할 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지치고 상처 입은 국민의 마음일 것이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