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5월 27일은 광주 민주항쟁 최후의 날이었다. 1980년의 그 날 새벽, 47개 대대 2만여 계엄군이 광주로 진입했다. 최정예 공수 특공대원들을 앞장세워 시민군 총본부가 있던 전남도청을 오전 4시쯤 완벽 포위하고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대부분 청년 학생이던 시민군을 보이는 족족 사살하거나 체포하며 난입 1시간 만에 도청을 완전히 장악했다. 비슷한 시간 광주공원, 전일빌딩, 관광호텔과 YWCA 등 시민군이 지키던 곳도 압도적 무력으로 제압했다. 79년 ‘12.12쿠데타’로 국가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그 완결판으로 기획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내란(內亂)’에 반발해 일어났던 광주 시민 피의 항쟁은 그렇게 처절하게 막을 내렸다.

5월 18~27일의 항쟁 기간 중 어느 하루, 어떤 한 시간도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을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국가의 안보를 책임진 군(軍)이 그 주인인 국민을 총칼로 도륙해 불과 열흘 동안 5천 명을 넘나드는 사상자를 냈다.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패고, 총으로 쏘고, 헬기 기총소사까지 하며 ‘인간 사냥’을 했다.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았다. 분노와 공포, 불안과 비현실감으로 심장을 짓누르는 아픔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단 열흘- 짧은 듯 무한히 길고, 또 긴 듯 순간처럼 짧았던 그 당시 광주에 있었던 이들은 44년이 흐른 지금도 분노와 회한, 좌절에 몸부림친다. 특히 ‘광주’란 단어만 들으면 떠오르는 두 가지의 강렬한 이미지를 지금도 떨쳐내지 못한다고 하소연한다.

그 첫 번째가 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진입 직전 캄캄한 광주 하늘에 끊어질 듯 울려 퍼지던 애절한 여성의 방송 음이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시민 여러분,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 갑자기 울려 퍼진 이 방송을 듣고 시민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집을 나갈 수도, 그냥 집안에 앉아만 있을 수도 없었다. 잠을 잘 수도, 그냥 깨어 있을 수도 없었다. 소리를 내기도, 옆 사람에게 뭐라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만 바라는 무력감에 몸을 떨었다.

도청 옆 여관에 투숙해 있던 뉴욕 타임스 특파원 헨리 스톡스도 방송을 들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자의 목소리가 지독한 정적을 깨트렸다. 캄캄한 도시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하나의 비명, 하나의 부르짖음이 되어 10여 분간 끊임없이 이어졌다. … 화가 뭉크의 ‘비명’에 나오는 불가사의한 얼굴과 움푹 팬 입을 머리에 떠올리고, 그 그림이 캄캄한 화실에서 별안간 목청이 생겨나 엄청난 음량으로 소리를 토해낸다고 상상해보라." 그도 숨죽이고 기다렸다. 문소리나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광주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집안에 들어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광주의 그 밤, 누구나 깨어 있으나 누구도 밖에 나가려 하지 않았던, 그래 죽어가는 젊은 학생들을 도와주지 못한 (실제 도울 수도 없었지만) 그 시간을 그는 끝끝내 지우지 못했다. 16년 후 스톡스 기자는 한국 언론에 "그날 광주는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라고 증언했다.

5월 광주에 있던 사람들이 또 하나 떨치지 못하는 건 그 새벽 도청에서 숨진 윤상원이 그려낸 이미지다. 그는 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다. 숨지기 불과 몇 시간 전인 26일 오후 5시 그는 항쟁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외신기자 회견을 열고 미국의 중재를 절절히 요청했다. 미국이 우방으로서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데도 그러지 않아 전두환을 지지하는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특히 미국 기자들에겐 대놓고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와 자신들의 협상을 주선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윤 대변인은 당장 그날 밤 계엄군이 쳐들어올 것임을, 자신의 짧은 삶은 그 밤이 마지막임을 직감적으로 아는 듯했다. 미국 볼티모어 선지(紙)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가 "계엄군은 당장 여기를 칠 수 있는 압도적 화력을 갖고 있으나 그대들 무장은 보잘것없다. 저항하다 죽을 각오가 돼 있는가? 항복할 것인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답은 명료하고 침착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외신기자 회견 후 그는 도청 사수조 중 여학생과 중고생들을 따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무 죄 없는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오로지 민주주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피를 흘리는 모든 과정을 너희는 똑똑히 지켜봤다. 이제 집에 가라. 살아남아 잊지 말고 후세에 전해라.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결국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끝내 살아 기억하고 역사의 증인이 되어 민주주의를 향한,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건 곧 27일 새벽 캄캄한 광주 하늘에 끊어질 듯 울려 퍼진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동의어였다.

죽어서도 스러지지 않는 염원인가. 윤 대변인은 2년 후 망월동 묘역에서 야학 동료 박기순과 영혼 결혼을 함으로써 광주 시민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났다. 황석영과 김종율 등은 5.18 2주년 추모 행사로 ‘광주에 살던 어느 두 젊은 넋의 죽음과 사랑에 관한 노래 이야기’ 즉 영혼 결혼을 노래극으로 만들기로 했다. 극의 클라이맥스 마지막 합창 부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들어갔다. 1780년 겨울 백기완이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떨며 멀어지는 의식을 다잡으려 입으로 쓴 장시(長詩) ‘묏비나리’의 거의 끝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 부분을 손봐 가사로 썼다.

1997년 법원은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 항쟁을 ‘국헌문란 세력에 항의하여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판시했다. 국가권력의 폭력적 지배에 맞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고 헌정질서를 회복 유지하기 위한 시민의 정당한 저항으로 본 것이다. 그해 정부는 5.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정치권은 이후 해마다 ‘민주주의’와 ‘저항’의 ‘5월 광주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개헌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올해 5월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민병욱 전 한국언론진행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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