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동안 완벽은 언제나 나를 피해 갈 테지만, 나는 또한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리라 다짐했다." 이 말은 현대 경영을 이룩한 독창적 사상가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2005)가 그의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The Essential Drucker(Vol. I-III)'에 적은 말이다. 18세가 되던 어느 날, 그는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Falstaff)'를 관람했다. 오페라 팔스타프는 베르디가 80세에 작곡한 곡으로, 과거에는 별로 연주되지 않았지만 이후 그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것 중 하나가 되었다. 가수들이나 청중들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던 그 곡은 베르디의 29개의 오페라 중 유일하게 희극이라는 장르로 작곡되었다. 피터 드러커는 베르디가 유쾌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오페라를 작곡한 여든 살의 노인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당시 18살이었던 그의 나이와 80세에 이토록 아름답고 유쾌한 오페라를 작곡했던 베르디의 열정과 노력이 그의 온몸을 두드린 것이다.

극장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베르디가 누군가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답한 글을 어느 책에서 읽었다. "이미 유명인이 된 당신은 이렇게 엄청나게 벅찬 주제를 가지고 더구나 그 나이에, 왜 굳이 힘든 오페라 작곡을 계속하는 것입니까?" 그때 베르디가 대답하기를, "음악가로서 나는 평생 완벽을 추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따라서 나에게는 분명, 한 번 더 인생을 도전해 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이 피터 드러커의 가슴에 영롱하게 남았고, 세간의 사람들이 그를 ‘경영의 신’이라고 칭송할 때까지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인생을 바꿀 만한 지적 경험의 첫발을 내딛게 했던 의미 있는 동기였다.

4세기 북아프리카 출신의 사상가이자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지적 통찰력을 주고 존경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천재성을 육체적 욕망과 지적 교만으로 탕진하는 시절을 보냈다. 일찍부터 스토아 철학과 마니교,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하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자신의 죄의식을 초월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지적 탐닉과 유희는 결국 그를 지적 논쟁에 빠지게 했고 더욱 익살맞은 지식인으로 살도록 내몰았다.

그러던 중, 로마의 멸망을 목격하는 등, 내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힘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장시간 맛보던 그는 기독교 신학에 매료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스스로 성공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의미한 말만 늘어놓는 지적 장사치로 변모되어 가는 자신을 고통스러워했다. 일찍이 베르길리우스와 키케로 등의 스토아 철학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그의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서를 통해 만난 후 끝을 맺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리저리 함부로 던져지는 느낌"을 거의 매일 경험했다. 그것은 C. S. 루이스가 말한 대로 "가장 깊은 고독 속에 자아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이 있으며, 가장 깊은 고독 속에서 순수하게 대상 그 자체를 보여주는 무엇과 영적으로 교섭"할 때 경험하는 겸손한 지적 경험이었다. 성서의 예수는 그에게 이타적이며 초월적 사랑과 진지하고 겸손한 지적 경험의 세계로 그를 이끌어 주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빅 미(Big Me)’를 추구하는 시대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누가 뭐라고 해도 겸양과 도덕적 실재론에 의존하는 것 보다, 자기 과잉의 시대, 즉 ‘빅 미(Big Me)’의 시대를 살아가도록 문화적으로 떠밀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는 자아도취로 이해되었던 자기 과잉의 심리가 이제는 성공의 척도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런 시대가 아무리 맹위를 떨친다 할지라도 인간은 성찰적 존재다. 우리 시대가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고 외치며 자기 과잉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영혼은 운동선수와 같아서 싸울 가치가 있는 상대를 필요로 한다. 시련을 겪으며 스스로 자기를 확장하고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다."라는 토마스 머튼의 말이 주목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배우고, 생각하는 성찰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인간 됨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차종관 세움교회 담임목사, 전 성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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