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는 프랑스 교회와 무척 인연이 깊다. 한국에 처음 천주교회가 전래된 다음, 조선 신자들이 교황청에 성직자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파리 외방전교회만이 이 요청에 부응하였다. 1831년 조선교구가 처음으로 설정된 이래 모방 신부가 1836년 첫 발을 내디딘 후 많은 선교 사제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당시에는 천주교가 금지되었기에 혹독한 박해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고 그중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는 12명이었다.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 사제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활발히 활동하며 일제강점기와 남북전쟁 등으로 고통받는 한국인의 삶에 함께 하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필자가 현재 와 있는 곳은 포항 오천읍에 위치한 한 피정의 집인데,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루이 델랑드 신부(1895-1972))가 설립한 예수성심시녀회 소속 수도자들이 ‘연피정’(수도자는 1년에 한 번 열흘 간의 피정 시간을 의무적으로 갖는다.)을 하는 장소다.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루이 델랑드(한국명 남대영) 신부는 1922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 한국에 도착하여 주로 경북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남 신부는 1922년 6월 경북 칠곡의 낙산 본당에서 시작하여 부산진, 남산동 본당을 거쳐 1934년 용평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동정녀 6명을 모아 ‘삼덕당’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회 사업 활동을 시작하여, 1946년 사회복지 법인 성모 자애원을 설립하였다. 1950년에는 포항 송정에 집을 마련하여 전쟁 고아를 받아들였고, 인근 어민에게 식량과 어선을 마련해 주었으며, 포항 죽도동에 성냥 공장을 세워 가난한 주민들에게 일터를 제공했다. 원래 의도치는 않았으나,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남 신부의 열정에 함께 하는 동정녀회가 시작되어, 여러 과정을 거쳐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추후 ‘예수 성심 시녀회’로 개명)가 설립되어, 1952년 대구대목구로부터 수도회 정식 인준을 받았다. 수녀회는 남 신부의 영성을 바탕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어, 현재 500여 명의 수도자가 소속되어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남 신부는 77년의 생을 살았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수녀회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포항을 빛낸 인물’에 선정되었고, 말년을 보낸 갈평 피정의 집에는 신부의 유품을 전시관으로 만들어 진열해 놓았고, 선종 당시 사제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언젠가 라디오를 통해 도덕경의 한 대목을 들은 적이 있다.

'타인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타인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센 데 불과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자라야 진정한 강자이다. 족함을 아는 자가 진정한 부자이며, 억지로 행하는 자는 특정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리할 곳을 잃지 않는 자가 오래가고,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자가 진정으로 장수하는 사람이다.'

남대영 신부의 삶을 되새기며, 죽어서도 잊히지 않고 진정으로 장수하는 사람이 바로 남 신부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델랑드 신부는 죽어서도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상관없이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남 신부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국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온 삶을 바쳐 그들을 모으고 돌봄을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고, 그 결과 1962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았고, 그의 소식은 프랑스에까지 소식이 전해져 1969년 11월 3일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최고 훈장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서로 남을 헐뜯고 정쟁만을 일삼으며 윗사람 눈치만 보고 국민의 고통은 외면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며 환멸을 느끼는 현시점에, 남 신부의 소박했지만 아름다웠던 삶이 이 사회를 비춰 주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기를 기대해본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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