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이론 1세대 주자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의 시대에 인류가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낙관적 미래를 오히려 야만의 시대로 변질시켰다고 비판했다. 그 시대는 심지어 ‘신을 제거’한 세상에 이성의 제국을 건설하려고 기획된 것이었다. 그럴듯했던 그들의 기획은 칸트를 위시한 프랑스의 이신론자들과 독일의 관념론자들, 그리고 영국의 경험론적 이신론자들에 의하여 숭배되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라는 호라티우스의 명문을 칸트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활용하여 인간이 주체가 된 이성의 제국을 위한 구호로 활용했다.

그들은 다시 총체적 지배구조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었고, 스스로 의식하기도 전에 자신을 억압하는 신화의 세계에 집착했다. 이러한 형국은 마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통해 폭로된 것처럼, 흡혈귀 제거를 위한 결사대를 자처했던 사람들이 정작 드라큘라는 제거하지 못하고 그의 주변을 혈기와 악의를 가지고 맴돌다가 그들 스스로 드라큘라를 닮은 기운에 잔인하게 중독되어 버린 형국과 유사했다.

계몽주의는 17세기와 18세기를 통해 그 위력을 떨쳤지만, 20세기 이후에도 그 기운은 곳곳에 여전히 존재한다. 다양한 비판이론과 비평이론들이 추구하는 제삼지대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왜 인간들은 진실로 인간적인 상태에 진입하는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야만성에 빠지고 마는가?"라고 질문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객관화를 획득하지 못하고 자기화에 빠져버렸다. 질문과 반성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만 그들에게 계몽적 사유에 따르는 진지한 진보는 없었다.

테리 이글턴은 결국, 계몽주의의 난동은 지나친 눈부심으로 스스로 눈이 멀어버려 반대편으로 뒤집혀 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계몽 이전의 인간, 즉 이성에 의해 포착되지 않은 자연을 맞닥뜨리게 되므로 과격화된 신화적 불안을 느낀 나머지 건강한 자기비판에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화라는 더 무서운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되었고, 탈 신화화 또는 ‘탈 마법화’라는 그럴듯한 기획으로 포장했지만,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에 등장한 낭만주의와 자유주의 또한 인간의 우월성이 의심할 바 없이 ‘낭만성’에 있음을 외쳤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우위적 관점으로 모든 대상을 추상화하여 인식하는 동일성의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등장한 고약한 사조는 여전히 계몽주의적 동일성 사고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자연을 객체로 밀어냈으며, 계몽 운운하던 구호는 또 다른 지배자가 되고 말았다. 계몽이라는 구호의 가면을 쓴 새로운 신화는 새로운 야만적 시대를 열어가는 징후를 다분히 드러냈다.

계몽의 시대가 소위 전능한 신의 존재가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스스로 알지 못했던 것처럼, 합리주의의 맥락에서 이상적인 도구가 되어버린 이성의 출처 역시 의문시되었다. 그들의 사상과 해석학은 믿음, 즉 종교적이고 사회학적 윤리라는 정치 이데올로기 형태로 개조되었을 뿐이다. 계몽주의는 21세기에 와서도 새로운 이성주의이자 지식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그럴듯한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몰아적 자기비판의 신화로 떨어졌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면을 쓴 이성은 그렇게 스스로 자기 논리와 합리화의 제물이 된 채, 타자를 모두 불신하는 불행하고 두려운 이념적 권위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종류든지 간에 이데올로기의 맹점은 자명하다. 그것은 자신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므로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해석학적 순환의 기초적 지평 자체를 상실한 계몽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세속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종교, 정치, 심지어 유행하는 문화 내에 존재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전통을 비판하고, 진리라는 이름으로 정통을 자인하지만 결국 기존의 권력을 대체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 깊이 동일화된 사람이나 집단은 신화 하나를 더 만들 뿐입니다.

보행자의 의식을 계몽하려는 횡단보도 앞의 현수막 글귀는 분명 ‘순수한 서술’인 듯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철학은 변혁을 위한 선한 의도 보다 적의에 찬 또 다른 이념적 계몽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불편하다. 진정한 계몽이란, 미성년의 상태에서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성숙한 지성적 의식과 판단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강요되는 게 아니다. 작금의 세월을 보니, 계몽이 또 다른 강요하는 계몽으로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있는 듯하다.

차종관 세움교회 담임목사, 성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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