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끝자락, 가을 햇살이 시리다. 불붙는 단풍이 이리 가슴 아리게 한 적은 처음이다. 교정을 들어서며 만나는 우리 친구들의 얼굴이 유독 반가운 만큼, 눈시울은 떨렸다.

숨 쉬고 있음을 다행이라 해야 하나? 우리의 무사함에 안도해야 하나? 내일을 위해 하루하루를 가쁘게 살아가는 내 젊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정 여건 때문에 알바를 놓지 못하면서도 성공한 프로그래머의 꿈을 가진 민구(가명).

어렸을 때 부모와 헤어져 할머니 품에서 자랐기에 소외된 이웃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혜정(가명).

병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의 간호사로 평생을 살겠다는 상현(가명). 미완성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완성하며 살아가는 나의 친구들의 모습이 오늘, 안쓰럽고 나를 더 허탈하게 한다. 그래도 열심히 살라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순간을 즐기며 살라해야 하나? 아프니까 청춘이라 말하기엔 너무 애틋한 청춘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동의하는가? 부동의 하는가? 행복은 ( )순이라 생각하는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서술하시오.’ 얼마 전 내 수업의 중간평가 문제 중 하나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동의했다. 성적이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거의 일치된 견해다.

그렇지만 알량한 선생의 가르침을 주고, 그들의 정진(精進)을 독려한답시고 "행복이 성적순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연봉은 성적순이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며 잔소리 했다. 자신의 나태함을 외면하는 성적이 좋지 못한 친구들의 자기합리화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학벌이 좋으면 자존감이 높고 가정생활 등도 좋아 ‘행복도 성적순’이라는 연구논문 등 나름의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며 말이다. (참고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학력(학벌)’의 비경제적 효과 추정’ 김영철 상명대 금융경제학과 교수, 2016. 연합뉴스)

학생들의 ‘행복은 재산(돈), 만족, 건강, 가족, 인간관계 등’이란 답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나 부자가 되지 않는다. 더욱 노력해야 한다. 인간에게 만족이란 없다. 만족이란 말로 안주(安住)하거나 회피(回避)하지 마라. 무기력한 자기변명을 일삼지 마라"며 그들의 성공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여지없이 문제적 꼰대발언을 일삼았다.

그러나 시월의 문을 닫으며 떨어져 버린 꽃 같은 청춘을 떠올리면, 가슴 먹먹함에 당위(當爲)라 생각하던 나의 꼰대적(?) 발언을 철회해야 할 것 같다.

유익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성공한 IT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아픈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그 청춘들에게 나는 더 이상 ‘내일을 꿈꾸라!’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내일 ‘부자’가 뭔 소용인가? ‘만족’이 뭔 말인가? 나는 ‘더 이상 미완성의 내일을 위해 오늘을 놓치지 말라!’ 말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여러분이 숨쉬고, 디디고 있는 이 순간이 여러분의 마지막 행복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오늘 나의 친구, 청춘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상황이 끝나고 뒤돌아 볼 때는 누구나 신이 된다. 나 또한 기회주의적 세상살이에 예외는 아니지만 유체이탈의 전지적 참견시점을 일삼는 소위 위정자들의 행태는 가소롭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가? 어른,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럴 때 자괴(自愧)라는 말을 써야 한다.

앞선 세대가 ‘꼰대’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그 조언이 씨알도 안 먹히는 이유는 청춘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큰 슬픔 함께 합니다.

정상환 국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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