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은 한양, 즉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였던 조선시대 이래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산이었지만,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수행의 장소로서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북한산 주변으로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사찰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은 비단 실제 원효대사나 의상대사의 창건은 아닐지라도 그분들의 제자들에 의한 창건일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서울 은평구에서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10찰 가운데 하나인 청담사의 터가 발견된 것은 북한산 지역이 통일신라 전기부터는 중요한 성역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북한산의 사찰로서 서울에서 널리 알려진 진관사, 삼천사, 승가사 등은 고려시대에 특히 그 사세가 확장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수도였던 개경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국사, 고승들이 북한산에 주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사찰에서 멀지 않지만 경기도 고양시에 속하는 북한산 지역에도 많은 고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중에 중흥사는 원래 조선시대에는 북한산 일대를 대표하는 가장 규모가 큰 절이기도 했다.

중흥사의 창건은 정확치 않으나 고려말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3)가 1341년 무렵 중창하고 후학들을 양성하는 도량으로 삼았다. 그는 또한 인근에 태고암도 창건하여 5년여 머무르다 원나라에 건너가 활약하는 등 국제적인 고승이었지만, 1348년 귀국한 뒤에도 다시 중흥사에 머무는 등 어떻게 보면 중흥사를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공민왕 당시 신돈과는 노선을 달리하면서 불교 자체 내에서의 개혁을 이끌었던 분이기도 하여 결국 고려 승단의 중심에 선 분이었으니, 결국 태고 보우 스님의 시절에는 중흥사가 고려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찰이었던 셈이다. 보우 스님은 나아가 고려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고 공민왕에게 주청까지 했는데, 나중에 이성계의 한양 천도의 구상은 여기서 발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중흥사가 더욱 중요한 사찰로 부각된 것은 병자호란 후 한양 방어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남한산성에 대응하여 북한산성이 숙종 37년(1711)에  대대적으로 중수된 이후였다. 북한산성은 이전에 중흥산성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흥사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산성의 축성은 승려들이 대거 참여하여 이루어졌고, 공사 후에도 승군이 조직되어 주둔하였기 때문에 성내에는 용암사(龍巖寺),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부왕사(扶旺寺), 원각사(圓覺寺), 국녕사(國寧寺), 상운사(祥雲寺), 서암사(西巖寺), 태고사(太古寺), 진국사(鎭國寺) 등의 사찰이 운영되었으며, 중흥사에는 이들을 총괄하는 승영(僧營)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총사령관격인 팔도도총섭은 이곳에 머물렀다. 
이 중흥사는 1915년까지 존속하였다. 1902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오래된 사진을 보면 대형의 법당과 그 앞의 누각이 보인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중심법당은 삼존불을 모신 대웅전이었고  나한전과 동쪽에 산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상으로 볼 때 법당과 누각이 있는 뜰을 감싸는 양쪽의 건물은 승려, 승군이 머무는 요사채로 보이며, 대웅전 바로 옆 서쪽의 전각이 나한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대웅전의 동쪽 옆으로는 팔도도총섭이 머무는 사령부격의 건물이 있었다. 또한 누각 양쪽 옆으로도 전각들이 길게 배열된 것이 보이는데, 혹 종루와 고루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큰 건물들이 요새처럼 둘러싼 웅장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다른 사진을 보면 사찰 아래에는 사하촌, 즉 절 아래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산 속 마을의 불자들과도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산사들은 주변에 민가가 없어 대중들의 공양을 어떻게 받았나 싶지만, 중흥사의 옛 사진을 보면 과거에는 깊은 산속에도 이렇게 마을이 형성되어 사찰이 격리된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흥사 및 북한산의 수많은 사찰들이 1915년 대홍수로 인하여 폐사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격동의 혼란기에 이 깊은 산중의 사찰과 마을을 복구할 여력은 오랜 기간 없었다. 이후 1994년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중흥사 일대에 대한 복원사업이 착착 진행되었다. 2012년에 대웅전과 요사채가 중건되어 법등을 이을 수 있게 되었고, 2017년에는 만세루와 전륜전(앞서 나한전 자리로 추정한 자리에 세워졌다)이 복원된데 이어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요사채와 팔도도총섭 건물이 복원되어 수행과 교육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특히 중흥사의 이러한 중창은 처음부터 원형복원을 목적에 두고 철저한 연구와 발굴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의 의의가 깊다. 

뿐만 아니라, 중흥사 아래의 너럭바위 위에는 산영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올라 시문을 짓기도 한 북한산의 명소였지만 이 역시 홍수로 사라진 것을 2015년 복원하였다. 홍수 이전의 흑백사진이 남아있어 이 역시 원형고증을 거쳐 복원할 수 있었다. 산영루의 멋드러진 현판은 서예 대가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 선생의 작품이다. ‘山’자의 가운데 솟은 ‘大’를 닮은 자획과 ‘영(暎)’자의 오른쪽 아래 ‘大’, 그리고 ‘루(樓)’의 오른쪽 아래 ‘女’자가 서로 유사한 모양으로 댓구를 이루며 시각적 운율을 느끼게 되어 한편의 시를 보는 듯하다.
중흥사를 방문했다면 계곡 맞은편, 태고 보우 스님이 창건한 태고사를 찾지 않을 수 없다. 원래는 중흥사의 동암(東庵)으로 창건되었으나, 태고스님의 입적 후 그를 기려 태고암으로 불렸다. 이곳도 홍수 및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점차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나마 그러한 피해 속에서도 태고 보우를 모신 원증국사탑과 탑비는 보존되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거대한 축대를 올라 태고사 대웅보전 앞에 이르면 그 바로 옆으로 보호각이 있고 원증국사탑비는 그 안에 모셔져 있다. ‘원증국사’는 곧 태고 보우 스님의 시호이다. 이 비는 고려 우왕 때인 1385년에 세워졌으며, 글은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학자인 이색이 짓고, 글씨는 역시 당대 필력으로 이름을 날렸던 권주가 쓴 것이어서 뜻깊은 문화재일 뿐 아니라, 함께한 사람의 명단에서 후일 조선을 건국한 ‘판삼사사 이성계(判三司事 李成桂)’의 이름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탑비 자체는 고려말의 형식적이고 투박한 조각양식으로 다소 퇴화된 양식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대에 들어서 조각기술이 퇴보하거나 조각가의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이 시대에 유행한 하나의 표현방식일 뿐이었다. 우리는 조선의 성리학이 추구한 검소하고 소박한 미의식이 조선시대에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알지만, 고려말 불교미술에서의 이러한 소박주의 미술이야말로 조선시대 유행한 검박한 미술의 전조였다고 할 수 있다. 불교 교단 자체 내에서 불교의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개혁을 추구했던 태고 보우 스님이셨던만큼 화려하고 호화로운 탑과 비 보다는 이러한 투박하면서 유머러스한 조형언어를 더 좋아하셨을 것 같다. 환하게 웃고 있는 돌거북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장례식장에 걸린 환하게 웃는 고인의 영정사진처럼 정겹고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탑비 뒤편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원증국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을 만나게 된다. 원래 승려가 입적하면 하나의 승탑이 세워지게 되지만, 태고 보우 스님의 승탑은 마치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드신 후 여러 개의 탑이 세워졌던 것처럼 사나사를 비롯한 몇몇 사찰에 나뉘어 세워졌다. 태고사는 그중에서도 보우 스님이 특히 정을 두고 머물렀던 사찰이니만큼 더욱 의미있는 사리탑이 아닐까.

원증국사탑은 탑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둥근 달걀을 두 개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모습이다. 사리를 모신 탑의 몸체가 이렇게 둥근 모양을 하게 되는 것은 이 시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마도 티베트의 불탑 형식을 모델로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화려한 장엄을 새긴 승탑보다 이처럼 단순한 둥근 형태의 탑이 더욱 검박한 이미지를 주기 때문에 채택된 형식으로도 생각된다. 한편으로 둥근 몸체는 유리병을 연상하게도 된다. 부처나 승려의 사리는 유리병에 담아서 탑 안에 넣었는데, 이 탑은 마치 거대한 유리병에 사리를 넣어 그대로 노출시킨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스루 사리탑이라고나 할까. 이 소박하면서도 중후한 탑은 이렇게 유리처럼 투명하게 불자들과 소통하던 당대의 고승 태고 보우 스님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중흥사와 태고사는 새롭게 복원된 사찰이지만, 복원의 모범을 보여준 사례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복원을 통해 또다른 천년을 기약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전통이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지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 보우 스님이 이곳 북한산 기슭 태고사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음은 그가 쓴 <태고암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이후 선시(禪詩)의 모범으로서 널리 칭송되었는데, 보우가 원나라에 들어가 임제종의 고승 석옹 화상에게 이 시를 보였을 때 그는 "이 암자가 있고 세계가 있었으며, 세계가 무너지더라도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며 칭송의 발문을 지어주었고, 조선 후기의 백파 긍선은 이 시를 주석한 <태고암가과석>를 지었다. 그 시의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吾住此庵吾莫識    비록 이 암자 내가 가는 곳이나 나도 잘 몰라
深深密密無壅塞    깊고 깊어 은밀하니 옹색함이 없다
函盖乾坤沒向背    하늘 땅 모두 뒤덮어 앞뒤가 없으니
不住東西與南北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珠樓玉殿未爲對    구슬 누각, 백옥 전각도 비할 바 아니고 
少室風規亦不式    소림사의 풍습과 규범도 따르지 않네
?破八萬四千門    팔만사천 번뇌의 문을 다 부수니
那邊雲外靑山碧    저편 구름 밖 청산이 푸르구나.

주수완 우석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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