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민자당을 탈당해 야당인 자민련으로 재기한 김종필(JP)은 국회 원내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사랑에는 후회가 없습니다"라는 시적인 발언을 했다. 그의 깊은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결별한 김영삼(YS)에 대한 애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투쟁과 협잡의 대명사인 정치인이 사랑과 후회란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 지금까지 인상에 남는다. 그때는 그래도 정치에 낭만이라도 있었다. 지금처럼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은 아니었다.

YS와 DJ는 서로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고 DJ는 자기를 죽이려 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청와대에 초청해 만찬도 베풀었다. 오죽하면 전두환은 DJ 집권 시절이 좋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치에 금도(襟度)가 있었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있었다. 그들의 그릇이 커서 그런지 아니면 지금처럼 진영 간의 피 말리는 싸움이 극렬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를 일이다.

집권 여당의 참패로 총선이 끝났다. 사실 패배는 예상됐던 일이다. 얼마만큼 지느냐가 관심사였다. 윤 대통령의 고집, 불통, 오만, 독선을 심판한 선거였다.

범죄자와 사기꾼, 그리고 막말 후보들이 당선됐다. 조·중·동을 비롯한 친정권 언론이 저질 후보를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정권 심판론과 민생 파탄에 맥을 못 추었다.

이제 남은 것은 윤 대통령의 결단이다. 국민의 뜻을 반영한 후회 없는 국정을 펼쳐야 한다. 주변에 개헌저지선을 막았다느니, 45%의 국민 지지율이 있었다느니 떠드는 인간들을 다 내쳐야 한다.

검찰총장 시절 윤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아니 대다수 국민도 마찬가지였다. 문 정권의 무능과 횡포, 특히 조국 일가의 비행과 추미애 장관의 꼴불견 행태가 핍박받는 윤석열 총장을 시대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윤석열이라는 후보가 없었던 들 국민의힘은 정권 교체조차 할 수 없었다. 취임 후 윤 대통령은 방향을 잘 잡고 신념에 차 있었으나 방식과 태도가 문제였고 대파와 이종섭 사태 등 선거를 앞두고 저지른 패착으로 참패했다.

남은 임기가 걱정이다. 하지만 총선 결과에 진정한 후회와 반성, 그리고 실천이 따른다면 희망은 있다. 총선 참패에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은 어느 영화에 나오는 검사의 대사처럼 "그러길래 좀 잘하지 그랬어"를 되뇐다.

인간은 늘 후회한다. 누구든 후회 없는 삶을 살기는 어렵다. 윤 대통령이 국민에게 다시 사랑받는 과정은 험난하다. 자력으로 국정과제를 추진할 동력도 잃었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파국이다.

사람이 변한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오죽하면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이 있겠는가? 윤 대통령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대통령의 그동안 말과 행동을 보면서 판단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총선 참패 후 대통령의 발언은 걱정스럽다. 진정한 반성이라기보다는 적당히 버티면 해결될 거라는 오판처럼 보인다. 죄송하다고 말하나 믿는 국민은 많지 않다.

2천500년 전 공자는 말이 많음을 경계했고 실천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국민은 얼핏 우매해 보여도 성인이라 불리는 공자와 다를 게 없다.

앞으로 선거는 계속되니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보수의 궤멸이니 하며 철 지난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휙휙 바뀌는 세상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민생과 나라의 앞날이 있을 뿐이다.

이번 총선에서 윤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신뢰마저 상실했다. 두 배 이상을 노력해도 쉽지 않다. 벼랑 끝 기회를 만들고 싶으면 지금 행태로는 어렵다. 4년간 사실상 국회를 장악한 야당과의 협치 없이는 국정 운영 자체가 불가능하다.

신념보다 실천이 먼저다. 포퓰리즘이 나쁘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에 빠진 국민을 납득시킬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물가를 비롯한 민생은 최악인데 고통 분담만 외쳐서 되겠는가?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가 국민에게 진저리가 아니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윤 대통령이나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사랑에는 후회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이인재 전 파주시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