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지는 불교와 유교 문명이 격렬하게 충돌한 현장으로, 당시 왕실과 불교계의 무수한 드라마를 간직한 채 장엄한 최후를 맞았다. 사진=양주시
회암사지는 불교와 유교 문명이 격렬하게 충돌한 현장으로, 당시 왕실과 불교계의 무수한 드라마를 간직한 채 장엄한 최후를 맞았다. 사진=양주시

회암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기록상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늦어도 12세기 무렵에는 이미 창건되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金)나라 사신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보한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남아 있다.

고려 충선왕 5년(1313)에 태고 보우(1301~1382)가 회암사에 출가했다는 기록도 <태고화상어록>에서 발견된다. 외국의 사신이 방문할 정도였으니 상당한 규모로 추정할 수 있다.

회암사가 거대한 규모로 존재한 이유는 고려 말, 조선 초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계를 좌지우지했던 원로급 고승들이 머물던 사찰이란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인도의 승려 지공(?~1363)은 회암사 융성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충숙왕 13년(1326) 3월부터 2년 7개월 간 고려에 머물렀다. 이 기간 회암사를 방문한 지공은 "산수지세가 인도의 나란타사와 흡사해 이곳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크게 흥할 것"이란 말을 남겼다. 이후 지공의 제자인 나옹 등이 주도해 262칸 규모로 회암사 중창이 완성됐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사 무학대사(1327~1405)를 회암사에 머물게 했다.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는 회암사에 궁실을 짓고 머물러 살았다. 사찰이 이성계의 행궁 역할을 겸하게 된 것이다.

이후 효령대군(1396~1486), 정희왕후(1418~1483), 문정왕후(1501~1565) 등 왕실 인물들의 후원을 입어 조선시대 최대의 왕실사찰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최대의 후원자였던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회암사에 불운이 드리웠다. 실록에는 명종 21년(1566)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선조 28년(1595) 회암사 옛터에 불에 탄 큰 종이 있다는 실록의 기사 등을 종합하면 회암사의 소실 시점은 16세기 말 경이다.

이후 선조와 인조 시기 재건된 기록이 있으나 예전의 규모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회암사는 아마도 17세기 후반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불교와 유교 문명이 격렬하게 충돌한 현장으로, 당시 왕실과 불교계의 무수한 드라마를 간직한 채 장엄한 최후를 맞았다.

한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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