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들어서면, 나는 벌써 봄을 기다리게 된다. 입춘이 지난 지금 봄기운이 화사하다.

정열과 낭만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았다"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이처럼 생명이 돋아나고 기운찬 생기가 대지를 흐르는 화창한 어느 주말, 커피 향이 유달리 좋은 F 카페에서 I 나라 출신 U를 만났다.

그녀는 5년 전부터 나의 상담실을 자주 찾는 내담자이다. 유난히 눈이 크고 깊어 쓸쓸해 보이지만 눈망울이 착해 보인다. 그녀는 늘 긴장된 나날을 보내게 되는 이국 생활에서도 자신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애쓰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같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을 도우려 노력한다. 그녀 주변에 사는 한 이주여성이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자신의 집으로 피해 올 때면, 언제라도 보살펴 주다가 조용해지면 보내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이 같은 여성들을 보면서 언젠가 그들을 위한 ‘사랑방’을 만들어 쉼과 힐링의 안식처를 만들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자신의 포부를 전하는 그녀의 얼굴 가득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 좋은 생각이니 돕겠다고 하였다.

이는 아주 오래전, 미국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한국에서 주한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와 생활하고 있던 여성 중,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미국 생활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여 힘들어하고 이웃과 섞이지 못하여 외로움에 지친 그녀들을 위해 ‘대화방’이라는 ‘교양교실’을 만들어 봉사하였던 기억이 나서였다. 그때 역시 따듯한 햇살 아래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는 봄날에 ‘대화방’ 프로그램을 열었었다.

이 ‘교양교실 프로그램’은 미국 생활에 필요한 ‘미국문화 이해하기’, ‘파티 준비하는 법’, ‘한국 노래교실’ 등이었다. 그녀들은 손님을 초대하면 상차림에서부터 겁이 난다고 하였다. 어떻게 식탁보를 치고, 포크와 나이프를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하고, 그 많은 유리잔은 그 쓰임에 따라 놓이는 자리가 달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하나 하나를 배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상담도 하며 도움을 주었다. 또한 ‘한국 노래교실’은 고향의 노래를 통해, 그들의 향수를 달래고 힐링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많은 여성이 이 대화방의 교육이 우울증이나 불안증 등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에 정주하는 이주여성들을 위해 또 한 번 ‘대화방’을 열어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가족 같은 이웃이 되어 줄 꿈을 쏟아놓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녀는 삶이 고단할 때면 교수님의 "내 안의 나를 사랑하자"던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존감을 높이고 정체성을 지키려 한다고 했다. 이토록 자기 관리에 철저한 그녀와 커피 향보다 더 짙을 봄빛의 들판을 기다리고, 따듯한 나라의 풍경을 함께 떠올리며 그녀의 추억 얘기를 귀에 담아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얼음장 밑에서 시냇물도 몸을 풀고 봄은 더 깊숙이 들어 왔다. U와 나는 어스름이 창가로 내릴 때까지 봄비 내린 뒤 힘차게 달리는 개울물처럼 기운차게 우리의 계획을 실천할 수 있도록 다듬고 또 다듬어 보았다. 사락사락 눈 녹는 소리 뒤로, 움트는 나뭇가지의 끝을 지나는 꽃샘바람의 생기가 퍼져오는 봄처럼, ‘대화방’을 꾸밀 우리의 꿈도 줄줄이 날개를 펴며 한가득 차오를 것이다.

서종남 한국다문화교육상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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