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개인 날 아침 하늘은 더욱 맑다. 그렇지만 그 깨끗한 대기에도 코로나 바이러스와 미세먼지와 무수한 전파는 가득하다. 과학자들이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꿔 전파에 실어 주고받는 기술을 개발한 후, 이제는 문자와 그림과 영상까지 전달하지 못할 것이 없다. 전자기파 존재를 처음 확인한 헤르츠는 "우주 공간 어디든 냄새도 무게도 빛깔도 없는 에테르가 있어서 전파를 전달한다" 하였다. 옛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으나, 지금은 생명과 에너지와 파동이 넘친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무엇이 미래에 또 나올지 모른다. 은하 저편에서 보낸 외계의 인사, 돌아가신 어머님이 건네는 당부, 마음에만 품고 발설하지 못한 사념이 서성이며 때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과학 발달은 의사전달 방법의 진화인 것 같다. 밤의 불과 낮의 연기로 산마루 징검징검 전하던 변고가, 말 갈아타며 건네던 소식이 이제는 거리와 위치 불문하고 발신과 동시에 수신된다. 특정 전파에 실어 허공에 날린 정보를 무선라디오는 튜너 돌려 받아들인다. 이러한 전기회로의 주파수 공진이나 공명 이르던 말 ‘동조(同調, tuning)’는 어느덧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바야흐로 무한소통의 시대이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자, 석가가 꽃 한 송이를 집어 (염화 拈華) 말 없이 대중에게 보였다. 다들 영문 모르는 중에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는다. (미소 微笑) 이 염화미소 후에 석가는 "마음으로 전하는 뜻을 네가 알았구나. 진리를 너에게 주마" 하셨다. 진리는 대화나 문자가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라는 말씀, 곧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유래이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이라는 고차적 깨달음이 담긴 이 어려운 말 ‘이심전심’이 오늘날은 절집 밖으로 나와 대중을 만난다. ‘이심전심’은 굳이 행동과 언어 통하지 않고도 의사를 전하는 통신수단이다. 그렇지만 이 최초의 ‘이심전심’에서 조차 꽃을 집어 드는(염화) 움직임과 웃음(미소)이라는 반응은 동원되었다. 또 그렇게 어느 정도 의표를 드러내었어도 오직 가섭만이 알아차렸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소통은 천리를 바로 눈앞인 듯 좁혔고, 소리와 글과 동작 무엇에든 막힘이 없다. 전할 마음만 있으면 어떤 시간적 장소적 장애도 없는 즉답의 동기화시대이다. 이심전심의 점잔을 떨 이유가 없다. 눈빛과 미소만으로 마음 알아주면 좋겠지만, 이는 무척 어려운 노릇이다. 말하지 않았으니 듣지 못함은 당연하다.

예의 바르고 점잖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지만 외려 ‘미안하다’는 말에는 인색하다. 길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거나 승강기에서 방귀를 뀌어도, 무표정한 얼굴로 거지반 모르쇠다. 자신의 처지를 말로 풀어내지 않으면서, 그러나 남이 이심전심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이런 수동적 태도는 상대의 오해를 부를 뿐이다. 미안할 때 미안하다, 고마울 때 고맙다 하는 것이야말로 에티켓의 기본이다. 태도와 표정까지 보탠 분명한 말로 의사를 전함이 옳다. 남이 나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상대의 둔감을 섭섭해 하기에 앞서, 스스로 분명히 전달했는지 되짚어 보자. 이전에나 통했을까, 이심전심은 현대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의사 표현과 소통 방식이다. 그러나 역시 일이나 관계나 감정에 있어 이심전심은 도달하고픈 지향점임이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될까. 남이 보아 나의 생각과 행동이 예측 가능해야겠다. "저 상황과 표정과 몸짓이라면, 그는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하는, 평소 행동과 생각에 어떤 일관성과 믿음이 형성되어 있어야겠다.

유호명 경동대학교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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