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점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국어의 사용이 청소년을 비롯해 성인에 이르기까지 오용, 변질돼 언어 훼손과 파괴가 도를 넘었다.

더더욱 기성세대들은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할 심한 욕설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통상적 언어로 사용하는 기막힌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데다 기성인의 언어도 거칠고 강하다. 예를 들면 화가 난다는 것을 ‘뚜껑이 열린다’, 굉장히 충격적이란 뜻을 ‘찢어진다’라고 하는 등등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강한 용어들이 사회전반에 걸쳐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왜 이런 현상들이 난무할까. 우선 원인부터 찾아보자. 현대 사회가 급격하게 발전하는 데는 금전의 위력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왔던 구 세대의 사람들은 우직하게 오직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우리나라가 경제 부국으로 성장하는 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경제부흥이 여과되지 않은 서양의 각종 문물들을 쏟아져 들어오게 하면서 서양의 것은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인 양 너도나도 따라 하기에 바빴다. 무슨 인용을 한다든지 풍속들이 신세대의 물결을 타고 인터넷 컴퓨터와 핸드폰을 통해 무자비하게 퍼졌다. 걷잡을 수 없는 문화의 홍수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렸고 그것을 비판하면 꼰대라는 소리를 들었다. 기존 세대들은 쉬쉬하며 몸을 사렸고 신세대에게 매도당할까봐 전전 긍긍했다. ‘삼강오륜’이 무너지고 ‘주자 십회’도 무너졌다. 급기야 기존세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 세대는 방관자적 자세로 돌아섰다. 물론, 신세대들이 받아들인 문화가 모두 비판할 것만은 아니다. 체면치레를 타파하고 실용주의를 택해 허례허식이 없는 문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근본은 인성의 올바름으로 판단된다. 지식이 뛰어나고 연구 능력이 뛰어나도 상시로 욕을 한다거나 과격한 행동을 한다면 용인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대선 전쟁이 불 붙으면서 정치의 본질인 정책과 비전 제시는 관심이 없고 오직 마타도어로 마녀사냥을 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언론에서는 대선 후보의 부인이 개인적으로 나눈 소견을 폭로하면서 무슨 국가적 문제처럼 호도하고, 또 다른 대선 후보는 형수에게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을 했다고 난리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누가 더 나쁘냐며 비교를 하는데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을 표시한 사람이 더 나쁘냐, 아니면 당신의 동생이 당신의 처에게 쌍욕을 수없이 해 대는 것이 나쁘냐, 하고 물어보면 자신이 속한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억지 합리화를 한다. 욕이란 것은 감정의 표출이다. 인간이다 보면 간혹 극도로 화가 나서 자조적인 욕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 분의 대선후보는 잠시도 아니고 상당 시간 쌍욕을 해댔다. 화가 난다고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인간의 세계에 법이 왜 필요하겠는가. 욕설을 마구잡이로 해놓고 우연이라고, 실수라고 하면 안 된다. 그보다 더 극한 상황이 발생하면 살인을 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한 마디 던진 욕설이라면 억지로라도 수긍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인간 됨됨이 부터 살펴봐야 한다. 만약에 욕설하는 유전인자를 가진 자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국정도 감정에 따라 마음대로 행한다면 대한민국의 앞날이 걱정된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가만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욕을 해보았다. 누가 들을까봐 겁이 났다. 그 욕이 되돌아와 내 귓속을 파고든다. 한 번 내뱉어진 욕은 사라지지 않고 허공을 타고 다시 내 귀에 들어와 몸을 부르르 떨게 한다.

김현탁 한국현대문학연구소 소장·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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