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내 어머니의 모교

"가평전투에서 처음 전사한 나의 부하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이 마땅하다."

1952년 가평.

전쟁의 포성은 계속되었으나, 희망을 꿈꾸는 학생들의 눈망울은 누더기 천막 학교에서도 빛났다.

이를 본 미 40사단 사단장 조셉 클리랜드 장군과 1만5천 명의 미 장병들은 2달러 이상씩을 모금하고, 장비와 자재를 지원하는 등 한국 청년들에게 학교를 지어주었다.

교명을 클리랜드 장군의 이름으로 하자는 주민과 장병들의 건의를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전쟁의 폐허에서도 반짝이던 한국 청년들의 눈망울 속에서,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전사한 또래 19살 청춘, ‘케네스 카이저(Kenneth Kaiser Jr)’ 하사를 기억하며 그의 이름으로 교명을 지었다.

‘가이사 중학원’(현 가평고, 카이저의 음차)은 ‘2달러의 기적’으로 불리운다.

구순을 앞에 둔, 내 어머니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애써 피하는 슬픈 옛노래다.

어린 동생들을 업고, 손을 잡으며 피난 길에 올랐던 어린 소녀의 고달픈 생존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방인들의 선의로 배움을 얻었고, 소녀의 꿈을 키웠으며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2달러의 기적’이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둘. 나의 군 복무지

"건너갈 수만 있었으면, 우리는 죽지 않았다"

1951년 인제.

중공군의 총공세 속에 치러진 인제지구 전투에 참여한 리빙스턴 소위는 후퇴를 거듭하다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막혀 적의 총탄 세례에 많은 부대원과 함께 전사했다.

리빙스턴 소위는 강에 다리가 없어 참패한 이곳에 다리를 놓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6.25 전쟁이 끝나자, 그의 아내는 한국을 방문해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다리 건설에 필요한 기금을 희사했다. 1957년 12월 4일 ‘리빙스턴 다리’가 준공되었다.

35년 전 나는 보병 제17연대의 정훈참모로서 부대 전사(戰史)를 발굴하고 기록하며 부대 역사관을 개설, 운영하면서 범람한 강물에 휩쓸리고 총탄에 희생된 청춘들의 안타까움과 전쟁의 아픔을 실감했다. 그리고 멀고도 먼 낯선 나라에서 숨져간 젊은 남편의 뜻을 기려준 아내의 사랑에도 감동했다.

비록 전쟁의 참혹함에 휩쓸려 갔지만, 그 자리에 놓인 리빙스턴 다리는 자유와 평화를 이어주는 희생과 사랑의 상징이다.

셋.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대가를 지불한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국가와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부름에 응했던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미국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19인 참전용사 상’에 새겨진 문구다.

1995년 나는 이 공원 준공식에 참석했는데 전쟁의 비극과 국제정치의 비정 그리고 참전용사에 대한 희생, 감사 등 복잡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성에 빠졌었다.

당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려질 정도로 베트남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 기념공원의 조성으로 많은 미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주목했고 자유와 평화를 위한 노력과 희생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누군가가 이미 선불(先拂)한 것이다.

우리의 자유가, 우리의 평화가, 우리의 희망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내어놓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의 여유로움은 본디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이름 모를 비목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 ‘애국심’의 용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평 앞바다 불타는 전함에서도 방아쇠를 부여잡고 대한민국의 국군임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국을 사랑한 만큼, 조국도 우리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옛 전쟁영화에 나오는 무명용사의 마지막 대사지만, 정말 우리의 영웅들이 사랑받았으면 한다.

"푸른 빛보다 더 푸른 청춘을 흔쾌히 내어 바치는 평범하나 결코, 작지 않은 우리의 영웅들에게 감사와 찬사를 바칩니다."

정상환 한경국립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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