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회암사지 사리 귀환식

 

일제강점기 유출된 고려시대 사리

보스턴미술관서 100년만에 귀환

광활한 회암사지 웅장한 특설무대

암울한 길 떠났던 시절 회한 풀 듯

구름떼 같은 불자들 머리숙여 합장

회암사 전성기 풍경 저절로 상상

1997년 겨울 무렵이었다. 크다고 말로만 듣던 경기도 양주의 어느 절터를 찾아갔다. 도착하는 순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광활한 규모에 압도당했다. ‘세상에, 이런 절터도 있었구나!’ 절터는 산자락을 따라 정연하게 늘어섰는데, 궁궐이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곳은 사라진 폐허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역동의 공간이었다. 이곳이 고려와 조선에서 이름을 날린 회암사지였다.

그 다음 해부터 회암사지의 전모를 밝히기 위한 발굴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수고로움 끝에 흙에 묻혔던 절터의 제 모습이 드러났다. 전성기의 영광을 재현할 수는 없었지만 절터를 정비하고 박물관도 지어 절의 면모를 새롭게 조명했다. 필자는 시원한 바람이 쐬고 싶을 때면 회암사지를 찾곤 했다. 절터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회암사지 사리탑 앞에서 절터를 내려다보며 스님과 불자로 북적거렸을 절을 상상하며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봉행위원장 호산 스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기에서 사리를 옮기고 있다.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봉행위원장 호산 스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기에서 사리를 옮기고 있다.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2018년 필자는 한 단체에서 해외로 나간 불교 공예품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부처님과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있는 사리장엄구도 소개했다. 큰 용기 안에 작은 용기 다섯 개가 들어있었고 용기마다 석가, 가섭, 정공과 같은 부처님 이름과 지공과 나옹 스님 이름이 기록되었다. 두 스님은 고려의 불교를 빛낸 고승이었다. 사리장엄구가 있던 유력한 후보지는 북한의 화장사와 남한의 회암사지였다. 회암사지 위쪽 언덕에 지공, 나옹, 무학 세 분의 승탑이 나란히 자리 잡았다. 그때 사리장엄구는 어디에 있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2024년 봄, 보스턴미술관에 있던 사리가 국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회암사지에서 ‘회암사 사리 이운 기념 문화축제 및 삼대화상 다례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스쳤다. ‘여러 인연이 쌓이고 때가 되어야 일이 이루어지는구나!’

6월 9일까지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6월 9일까지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행사 당일 회암사지를 감싼 천보산은 푸른 봄빛으로 물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넓은 행사장을 채워나갔다. 사리의 주인공 나옹 스님이 이곳에서 법회를 열 때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한다. 행사장에는 흥분과 떨림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길고 높은 특설 무대에는 하늘 높이 괘불이 세워졌고 지공, 나옹, 무학, 득통 스님의 진영이 나란히 놓였다. 회암사가 불탄 16세기 이후 처음인 풍경일 듯싶었다.

사리가 특설 무대로 이운되면서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리는 먼 곳을 돌고 돌아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환지본처(還至本處)’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도굴범의 눈에는 성스러운 보물인 사리가 돈으로 보였다. 제자리를 떠난 사리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건너가 보스턴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먼 이국땅에 있던 사리는 점차 잊히는 듯했다.

사리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여러 인연과 인연이 만나고 더해져야 했다. 사리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던 스님의 노력과 조계종의 뜻이 모여 고비 고비를 이겨냈다. 사리를 담은 사리기는 함께 돌아오지 못했지만 사리가 돌아온 것만 해도 뜻깊은 일이다. 예전 어둡고 암울한 길을 떠났던 사리는 그동안 쌓인 회한을 풀어내듯 신심 깊은 불자들의 합장을 받으며 돌아왔다.

사리가 특설 무대로 이운되고 있다.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사리가 특설 무대로 이운되고 있다.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사리가 단상에 놓인 후 108배를 비롯한 각종 불교 의례가 이루어졌다. 잔디 광장을 꽉 채운 불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의례에 동참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회암사지가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엄숙하고 경건한 행사가 끝나고 문화공연이 시작되었다. 회암사지에 노래가 울려퍼지며 시끌시끌해졌는데, 야단법석이 따로 없는 축제의 장이었다. 사람들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사리가 돌아온 기쁨을 함께 나눴다.

 

경건한 의례 후 이어진 축제의 장

광활한 절터 오랜 침묵 깨듯 활기

사리봉행한 호산스님 사리친결 길

일제 아픈역사 보듬는 위로의 걸음

마침내 공개된 진신사리 아우라

친견 마친 불자들 환한얼굴 충만

봉행위원장 호산 스님은 사리기를 받들고 특설 무대를 떠나 한 발 한 발 회암사지를 올랐다. 오랜 고난을 끝내는 걸음이었고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보듬는 걸음이었다. 불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걸음을 뒤따랐다. 마침내 회암사지 위쪽에 마련된 사리를 친견하는 곳에서 발걸음이 끝났다. 스님이 반짝거리는 큰 사리기를 열자 안쪽에 들어있던 다섯 개의 작은 사리기가 나타났다. 사리기는 새로 만들었다. 작은 사리기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기를 열자 마침내 사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순간 회암사지가 환해지는 듯했다.

많은 이들의 노력과 인연이 모여 사리는 전시물에서 성보로 돌아왔다. 미술관 수장고나 전시실이 아니라 회암사지에서, 낯선 관람객이 아니라 두 손 모은 불자들이, 관람이 아니라 친견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회암사지 초입 행사장에서 사리를 친견하는 곳까지 줄이 길게 늘어섰다. 행사에 참석한 불자들은 사리를 친견하려는 마음으로 새벽부터 서둘러 길을 나섰을 것이다. 긴 기다림 끝에 사리를 친견한 불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행사에 참여하고 사리를 친견하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짓는 일이다. 친견을 마친 불자들은 환한 얼굴로 회암사지를 떠났다.

사리를 친견하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사리를 친견하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사람들이 늘어선 회암사지를 멀리서 보기 위해 회암사지 사리탑으로 올라갔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회암사지가 폐허가 된 이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때가 있었을까? 회암사지를 물들인 사람들을 보며 불교를 강력하게 통제한 조선에서 불교가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앙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때로는 죽음을 뛰어넘을 만큼 강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길고 긴 줄도 점점 짧아지더니 어느새 마지막이었다. 사리는 조심스레 사리기에 담겨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상설전시실로 옮겨졌다. 잠깐이지만 사리는 박물관에서 일반 관람객을 만난다(박물관 1층 상설전시실 내 친견실. 6월 9일까지).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불자나 일반인들에게 사리를 친견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사리가 돌아온 여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아침부터 시작된 행사는 모두 끝났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도 회암사지를 떠났다. 행사장은 무대를 철거하고 장비를 치우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했다. 행사는 끝났지만 필자는 할 일이 남았다. 회암사지 위쪽 언덕에 자리 잡은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의 승탑을 만나는 일이다. 보스턴미술관에서 온 사리가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회암사지 위쪽에 있는 지공 스님의 승탑을 꼽는다. 때문에 이런 날에는 더더욱 찾아가야한다.

언덕 위 지공·나옹·무학스님 승탑

사리 환지본처 의미 되새기기도

회암사지박물관 6월 9일까지 전시

지공 스님의 승탑. 위쪽으로 나옹 스님, 아래쪽으로 무학 스님의 승탑이 놓였다.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지공 스님의 승탑. 위쪽으로 나옹 스님, 아래쪽으로 무학 스님의 승탑이 놓였다. 사진=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가파른 길을 오르면 회암사가 나온다. 이 절은 원래 있던 회암사가 폐허가 된 후에 지어졌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오랫동안 끊어졌던 회암사의 역사를 이었다. 회암사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언덕을 따라 늘어선 세 스님의 승탑이 보인다. 가운데가 지공, 위쪽이 나옹, 아래쪽이 무학 스님의 승탑이다.

그런데 승탑 앞 비석 가운데 오래된 비석이 이상했다. 비석의 받침과 덮개만 있을 뿐 기록이 있는 비석의 몸통은 온데간데없다. 이곳의 승탑은 일제강점기 때만 수난을 당한 게 아니다. 조선 순조 임금 때인 1821년 유생 이응준이 이곳에 아버지 무덤을 쓴다고 승탑과 비석을 파괴했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이응준을 처벌하고 승탑을 다시 세우고 비석을 새로 만들고 그 옆에는 회암사를 짓도록 했다. 무학 스님 비석의 글을 짓도록 지시한 사람이 다름 아닌 태종이었기 때문이다.

지공, 나옹, 무학 세 스님은 모두 스승과 제자 관계다. 선종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상당히 중요하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깊어서였을까, 지공과 나옹 스님은 미국에서도 함께였다. 이제 두 분은 고단했던 외국 생활을 마치고 있어야할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말없는 지공 스님과 나옹 스님의 승탑 앞에서 잠시 시절인연과 환지본처의 의미를 되새겼다. 누군가가 내디딘 첫 걸음과 그 위에 걸음들이 더해져 오랜 바람이 이루어졌다.

승탑을 떠나 회암사를 한 바퀴 돌고 회암사지로 내려왔다. 그 사이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고 동쪽 하늘에는 달이 떠올랐다. 절터는 점점 어둠이 번져갔고 절터를 밝히는 조명은 밝아졌고 달은 환해졌다. 지금쯤 미국에서 돌아온 사리도 박물관에서 첫날밤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절터에는 낮 동안 사람들이 내뿜은 흥분과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해는 완전히 넘어갔고 하늘 높이 뜬 달이 절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리가 돌아오고 달빛이 골고루 내리는 절터는 그 자체로 충만했다. 이제 회암사지를 떠날 시간이었다.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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