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人Story

다문화인 200만 시대다. 주위를 둘러보면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념은 아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중부일보는 이에 대한 간극을 좁히고자 ‘다문화人Story’를 연재한다. ‘다문화人Story’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문화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소개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이자스민 전의원이 본보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채운기자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이자스민 전의원이 본보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채운기자

‘이주민 출신 국회의원 1호’. 필리핀에서 온 결혼이민자 이자스민(Lee Jasmine·46) 씨에게 붙는 수식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지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주민’이란 꼬리표가 붙는다. 어찌 보면 국회의원이란 특별한 경험도 ‘이주민’이여서 가능했지만, 이주민은 우리 사회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다. 다문화국가 진입을 눈앞에 둔 이주민 250만명 시대. 그는 우리 사회에 ‘공존’을 주문한다. 이제 이주민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이다. 새해에 대한 소망과 설렘이 가득 한 12월의 끝자락,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지난 1995년 필리핀에서 한국인 남편과 결혼했다. 임신이 됐는데 한국에서 아기를 낳았으면 좋겠다는 남편과 시댁의 의견에 따라 한국에 머물면서 계속 거주하게 됐다. 사실 남편이 한국인이니까 어디에서 낳든 아이는 한국 국적을 받게 돼 있다. 국적 취득이 문제는 아니었고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랬다. 시댁에서 아이를 가까이에 두고 보고 싶었던 것 같다."

- 국제결혼이 흔하지 않던 때였다. 남편과 어떻게 만났나?
"당시 우리 집은 필리핀에서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 때문에 필리핀에 온 남편이 우연히 우리 가게를 들렀는데 그때부터 나를 쫓아다녔다. 남편 말에 따르면 첫눈에 반했다고 하더라. 배를 타는 남편 직업 특성상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데 어디를 가든 선물과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한 달 중 반은 필리핀에 와서 나와 시간을 보내고 갔다. 1년 반 정도 연애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결혼했다."

- 지난 2010년 안타깝게도 남편이 유명을 달리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가족끼리 계곡으로 물놀이를 하러 갔다. 그런데 계곡에서 수영을 하던 딸아이가 급류에 휩쓸리는 일이 일어났다. 순식간이었다. 남편이 황급히 물에 뛰어들어 다행히 딸아이를 구해냈다. 하지만 남편은 급류 휩쓸려 돌아오지 못했다."

- 갑작스런 남편의 부재 때문에 힘들었을 것 같다.
"물론이다. 가장 걱정된 것은 딸아이였다. 본인 때문에 아빠가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 속에 살아가진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아빠가 있을 때처럼 아이들의 환경을 유지해주고 싶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힘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로 방송국에서 통·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조금 쉬었다가 출근해서 밤새 일하고 아침에 들어와 다시 등교시키고 조금 쉬었다가 또 출근했다."

- 지난 2012년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비례)이 됐다. 정치의 꿈이 있었나?
"제의는 꾸준히 있었지만 정치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8년 한국여성정치연구소가 ‘이주 여성 지방의원 만들기’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이주민 출신 여성을 지방의원으로 당선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연구소에서는 한국어를 잘하는 이주 여성을 찾고 있었는데 그들의 눈에 띈 사람 중 한 명이 나였다. 당시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해당 방송 PD를 통해 참여 요청을 받았다. 처음엔 참여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참여를 결정했다."

- ‘보수 정당의 공천을 받았다’는 것도 화제였다.
"내 선택에 있어 정당의 색깔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정당에 들어가느냐보다 국회에 들어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사실 보수 정당이든 진보 정당이든 이주민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단 국회에 입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비례 공천 제의가 왔을 때 받아들였다."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에스플렛스센터에서 이자스민 전의원이 프로필 촬영을 하고 있다. 임채운기자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에스플렛스센터에서 이자스민 전의원이 프로필 촬영을 하고 있다. 임채운기자

- 당시 의정활동에 대해 스스로 평가한다면?
"이주민(이민) 정책과 관련해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 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주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기사가 나가면 댓글은 악플로 도배가 된다. 댓글 내용이 좋든 나쁘든 조회수가 많이 나왔다(웃음). 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특히 이주민 관련 정책이나 이슈를 혼자 감당하기엔 벅찼다. 혼자 이리저리 뛴다고 법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동료 의원들과 함께 진행해야만 한다. 한편으론 ‘왜 조금 더 과감하게 하지 못했을까’라는 후회도 든다."

- 당시 일부에선 ‘한국인이 낸 세금으로 필리핀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펼친다’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오해가 있다. 지난 2013년 필리핀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나는 국회의원 자격으로 필리핀 복구 돕기 결의안을 냈다. 동료 의원들이 필리핀 출신인 내가 결의안을 대표로 발의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 것뿐이다. 이웃 국가가 재해, 재난을 당하면 국회가 피해 국가를 돕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내는 것은 일반적이다. 일본이나 아이티가 재해를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내가 필리핀 출신이니까 일부에서 필리핀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오해한 것이다."

- 정부가 이민청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이주민 정책은 한국에 정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가 이주 노동자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 중 하나는 ‘한국에서 돈 벌어 본국에 다 보낸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주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가족들이 다 본국에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돈을 쓰겠나. 또 유학생들을 활용하는 방법도 찾아야 한다. 정부는 외국의 우수한 인재들에게 장학금까지 주면서 국내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런데 유학생들은 졸업하면 국내에 남지 않는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왜 우리가 만든 인재를 해외에 뺏겨야 하나."

- 4월에 선거가 있다. 전직 의원으로서 바람을 전한다면.
"우리 사회가 국경의 문을 닫지 않는 이상 다문화 사회로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이제 이주민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제2, 제3의 이자스민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주민이나 다문화와 관련된 이슈를 다루고 과감하게 사회 통합을 위한 법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국회에 입성하길 바란다."

- 마지막 질문이다. 이자스민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언제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갈 거냐고. 물론 걱정스러워 한 얘기겠지만 그 안에는 큰 차별이 존재한다. 사람들 인식 속에서 나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지 20년도 넘었고 아이들도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다. 수식어 없이 오롯이 ‘한국인’으로 인정받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세용기자 / 사진=임채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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