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人Story

다문화인 200만 시대다. 주위를 둘러보면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념은 아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중부일보는 이에 대한 간극을 좁히고자 ‘다문화人Story’를 연재한다. ‘다문화人Story’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문화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소개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스테파니 씨가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콜롬비아 참전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고 있다. 임채운수습기자
스테파니 씨가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콜롬비아 참전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고 있다. 임채운수습기자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스테파니 가오나 아구엘로(Stephanie Gaona Arguello·31) 씨. 이름도 생소한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 출신 산티아고 가오나 카페나(Santiago Gaona Cadena) 씨의 외손녀다. 몇 해 전 한국전쟁기념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 할아버지가 피 흘려 지켜낸 땅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려가는 중이다. 스테파니 씨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는 게 못내 안타깝다"며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얻은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전 70주년을 일주일 앞둔 수요일 오전, 전쟁기념관에서 그를 만났다.

드라마 때문에 한국에 관심…조부 참전사실 알게 돼

한국전쟁기념재단 장학생으로 선발…숙명여대 재학 중 

-한국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언니의 대학 친구 중 한 명이 한국 드라마를 많이 좋아했다. 그분 권유로 한국 드라마를 접하게 됐는데 너무 재밌었다.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고 역사나 문화에 관한 공부도 시작했다. 그때부터 한국 유학을 꿈꿨다. 처음 방한한 건 2017년이다. 연세어학당에서 2년간 한국어 공부를 하고 귀국했다. 이후 2021년 한국전쟁기념재단에서 진행하는 장학 프로그램에 선발되면서 다시 오게 됐다. 지금은 숙명여대에서 글로벌협력을 전공하고 있다.

-외할아버지가 한국전 참전군인이라고 들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와 이혼하고 따로 살았다.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모일 땐 할아버지 얘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오랜 시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니까,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참전 사실을 알려줬다.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만난 날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됐고 이후 많은 얘기를 나눴다.

-할아버지 반응은 어땠나?

매우 좋아하셨다. 내가 한국에 가서 유학하고 싶다고 하니 비용을 모두 지원해 주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마도 한국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으셨던 것 같다. 폐허가 된 도시, 굶주린 피난민 등 전쟁 당시 피폐했던 모습을 들려주셨다. 당시 가장 힘들었던 건 겨울 날씨였다고 했다. 콜롬비아도 겨울이 있긴 하지만 한국만큼은 아니다. 동상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고생했다고 들었다.

스테파니 씨가 인터뷰 중 한국전쟁 참전 당시 할아버지가 찍힌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임채운수습기자
스테파니 씨가 인터뷰 중 한국전쟁 참전 당시 할아버지가 찍힌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임채운수습기자

할아버지는 1951년 입국…정찰 업무 중 폭격에 부상

2019년 방한때 발전된 한국 모습 보고 눈물 흘리기도

경제적 궁핍 겪는 한국인 참전용사에 큰 관심 보여주길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던가?

할아버지는 정치, 사회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한국전쟁이 벌어질 당시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 이념적 대립이 심할 때였다. 할아버지는 공산주의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이 일종의 이념 대리전이 되면서 참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콜롬비아 법에 따르면 18세 이상이라야 군대에 갈 수 있는데 당시 할아버지는 16살이었다. 입대가 불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신청을 했고 콜롬비아 정부도 군인 모집에 어려움이 있었는지 결국 입대를 허가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떤 임무를 맡았나?

1951년 12월 19일 입국해 약 1년간 복무했다. 처음엔 정찰 업무를 맡았는데,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아군이 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후엔 전초기지에서도 근무했다고 들었다.

-참전 중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는 정찰 업무를 하다가 중공군의 폭격을 맞았다. 동승 했던 상사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할아버지도 발목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그 부상으로 5개월 정도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회복은 어느 정도 됐지만, 부상 이전의 온전한 상태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그때 이후 할아버지는 항상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었다.

-할아버지가 다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지난 2019년 방문했다. 참전 이후 첫 번째 방한이었는데, 당시 나도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곳을 함께 다녔다. 63빌딩도 가고 현충원에도 다녀왔다. 할아버지는 특히 김치나 삼겹살 등 한국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보통 외국인들은 잘 못 먹는데, 할아버지는 달랐다. ‘왜 이제야 이런 음식을 먹어보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놀랐던 건 발전된 한국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거다. 내겐 언제나 당당한 마초 같은 분이었는데 말이다.
 

스테파니 씨가 전쟁기념관 외부에 설치된 콜롬비아 참전군인 추모비를 바라보고 있다. 임채운수습기자
스테파니 씨가 전쟁기념관 외부에 설치된 콜롬비아 참전군인 추모비를 바라보고 있다. 임채운수습기자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다. 참전군인의 후손으로서 어떤 생각이 드나?

세계 역사에서 한 나라만을 위해 여러 국가가 전쟁에 뛰어든 사례는 한국전쟁이 유일하다. 콜롬비아를 비롯해 많은 나라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한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국인들은 외국인 참전군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항상 "우리를 도와줘서 고맙다"며 존경심을 나타낸다. 비록 우리 할아버지는 여기에 없지만, 안부를 걱정하고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런데 한국인 참전군인들은 외국인 참전군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과 예우를 덜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인 참전군인들과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사는 듯 보였다. 그들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 살아있는 한국인 참전용사들이 많지 않은데, 지금이라도 그분들에게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길 바란다.

이세용기자
사진=임채운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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