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 오랜만에 만난 가족·친지들과 얼굴을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술과 음식이 곁들어진다.

경기지역은 한강이 흐르고 유명한 쌀 생산지가 많아 전통주를 만드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이번 추석에는 경기지역에서 빚는 전통 술로 명절 분위기를 높여보는 건 어떨까.

오랜 역사를 지닌 양조장부터 역대 대통령이 사랑했던 술, 특산물을 활용한 술 등 추석 연휴 맛볼만한 경기지역의 특색있는 술을 소개한다.

◇100여 년의 역사는 기본… 오랜 전통 자랑하는 술과 양조장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건물은 어디일까. ‘지평막걸리’로 유명한 양평군 지평양조장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양평군 지평양조장 전경. 사진=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양평군 지평양조장 전경. 사진=문화재청

1925년 설립해 98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지평양조장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유엔군의 지휘사령부로 활용된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등록문화재 제594호로 지정됐다.

지평막걸리는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김기환 대표가 경영을 맡은 이후 수도권으로 시장을 확장하면서 장수막걸리와 더불어 대중적인 막걸리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맛을 보니 달짝지근한 맛이 탄산과 조화를 이뤘고, 술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었다.

고양 ‘배다리 막걸리’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15년 고양군 원당면 주교리(현 덕양구 주교동)에서 박승언 창업주가 ‘인근상회’라는 이름으로 양조장을 시작한 이래 현재 5대째 막걸리를 만들고 있다.

배다리 막걸리는 1966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간택’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골프를 치고 들린 한 실비집에서 맛본 이후 일주일에 한 번꼴로 주문했으며, 서거 당일인 1979년 10월 26일에도 가져갔다고 한다.

고양 배다리 막걸리를 즐겨 마시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재현한 모습. 사진=경기관광누리집
고양 배다리 막걸리를 즐겨 마시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재현한 모습. 사진=경기관광누리집

그 명성은 북한까지도 알려졌다. 2000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방북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박정희 대통령이 먹던 막걸리를 마셔보고 싶다"고 요청해 배다리 막걸리를 북한에 가져가기도 했다.

광주시 남한산성 소주도 조선 선조 때부터 빚어왔으며 임금에게도 진상됐던 술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견뎌낸 남한산성 소주는 고 강석필 명인의 아버지 강신만 씨가 기술을 물려받으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994년 12월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13호로 지정됐다.

남한산성 소주는 재래식으로 곤 조청으로 술을 빚어 독특한 맛과 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숙성도를 높였다.

한편 남한산성 소주 양조장에서는 참살이 막걸리도 제조되고 있다. 참살이 막걸리는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된 바 있으며,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대형마트에 참살이 꿀 막걸리가 판매되고 있어 직접 구매해봤다. 꿀이 들어가 단맛이 강하게 느껴졌고 막걸리 특유의 맛이 덜한 순한 맛이 났다.

배상면주가에서 운영하는 전통술 박물관 '산사원'의 모습. 사진=네이버 지도
배상면주가에서 운영하는 전통술 박물관 '산사원'의 모습. 사진=네이버 지도

역사는 짧지만, 술도가로서 전통을 착실히 이어가는 곳도 있다. 국순당 창업주인 고 배상면 회장의 차남인 배명호 대표는 배상면주가를 설립하고, 포천에 전통술 박물관인 ‘산사원’과 느린마을 양조장 등을 운영하며 전통 술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장녀인 배혜정 대표도 화성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배혜정 도가’를 설립해 국내 최초의 유리병 막걸리인 ‘부자’ 시리즈 등을 생산하고 있다. 사전 신청을 통해 양조장을 찾아 직접 술 빚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북한 전통주 감홍로·문배술·계명주, 경기도에 자리 잡아
북한 지역에서 이름을 알린 전통 술 중 일부는 한국전쟁 이후 경기도에 자리 잡아 새롭게 출발했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포암 이경찬 선생은 평양에서 문배술과 감홍로를 제조하는 양조장을 3대에 걸쳐 운영했다. 남한으로 내려와 기술을 지킬 수 있었지만, 1965년 양곡관리법을 제정하면서 술 만들기를 멈췄다.

이후 전통주 진흥 움직임이 일면서 다시 술을 만들었고 문배술은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에 지정됐다. 이경찬 옹 사후 문배술은 장남 이기춘 명인이 김포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감홍로는 딸 이기숙 명인이 맡아 2005년부터 다시 제조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된 문배술은 도수를 23도로 낮춰 대형마트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이한빛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된 문배술은 도수를 23도로 낮춰 대형마트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이한빛 기자

문배술은 좁쌀과 수수를 섞어 빚어 발효시킨 증류주이지만 야생 배의 일종인 문배의 향이 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문배술은 40도에 달하지만,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문배술은 23도였다. 한 모금 마시자 알코올의 센 맛이 느껴졌다. 배향이 나다 보니 이과두주를 마시는 느낌도 들었다.

고려 시대 때부터 왕에게 진상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배술은 남북 화합의 상징으로도 꼽힌다. 1990년 남북 총리급 회담에서 처음 만찬주로 쓰였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후 2004년 남북 장성급 회담과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도 문배술은 빠지지 않았다.

감홍로는 육당 최남선이 조선 3대 명주 중 으뜸으로 꼽았으며 소설 ‘별주부전’과 ‘춘향전’에서도 언급되기도 했다. ‘맛이 달고 붉은빛을 띠는 이슬 같은 술’이라는 뜻의 감홍로는 세 번 고아 만든 소주에 꿀을 넣어 단맛을 냈고 용안육, 계피, 진피, 정향, 생강, 감초, 지초 등의 한약재가 들어가서 붉은빛을 띠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고 이경찬 선생의 대를 이어 감홍로를 생산하고 있는 이기숙 명인. 사진=네이버쇼핑 '이기숙명인 감홍로'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고 이경찬 선생의 대를 이어 감홍로를 생산하고 있는 이기숙 명인. 사진=네이버쇼핑 '이기숙명인 감홍로'

감홍로는 육류나 부침개류와 잘 어울린다. 과거 평양 사람들은 돼지 내장을 재료로 만든 내포중탕과 어울려 먹었다고 전해진다. 디저트류와도 잘 맞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이화여대 조미숙 교수팀의 조사 결과 초콜릿케이크가 가장 궁합이 잘 맞은 것으로 나타났다.

계명주도 한국전쟁 당시 평안남도에서 월남한 결성 장씨 집안에 의해 전승됐다.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온 최옥근 명인이 제조 방법을 물려받아 전통을 이어갔고, 198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다.

계명주는 ‘술을 담근 다음 날 닭이 우는 새벽녘에 먹을 수 있도록 빚은 술’이라는 뜻으로 ‘엿탁주’로도 불린다. 엿기름을 사용해 술이 빨리 익도록 했다. 계명주의 역사는 고구려부터 시작한다. 중국의 농서인 ‘제민요술’에 ‘하계명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도 술 빚는 방법이 나온다.

◇가평 잣과 연천 율무, 전통주와의 만남
지역 특산물과 술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는 조합 중 하나다. 알밤 막걸리(충남 공주), 사과 막걸리(충북 충주), 복분자 막걸리(전북 고창) 등 색다른 형태의 막걸리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경기지역에도 몇몇 특산물 막걸리들이 눈에 띈다.

경기지역을 대표하는 전통술인 문배술, 지평 생막걸리, 우곡생주, 참살이 꿀막걸리, 느린마을 막걸리, 가평 잣 생막걸리(왼쪽부터). 이한빛 기자
경기지역을 대표하는 전통술인 문배술, 지평 생막걸리, 우곡생주, 참살이 꿀막걸리, 느린마을 막걸리, 가평 잣 생막걸리(왼쪽부터). 이한빛 기자

대표적으로 가평군의 특산물인 잣을 이용한 잣 막걸리가 있다. 1928년부터 양조장을 운영해온 ‘우리술’에서 생산하는 ‘가평 잣 생막걸리’는 막걸리 전용 쌀과 가평 잣, 지하 250m 암반수를 원료로 하는데 지난 2013년 업계 최초로 HACCP(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인증을 받으며 위생과 안전 면에서 인정받았다.

연천군에서는 율무를 활용한 술이 만들어졌다. 연천은 국내 율무 생산량의 7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천양조장은 율무와 민통선에서 재배하는 연천 쌀을 바탕으로 막걸리와 동동주, 소주를 생산하고 있다.

동동주는 물을 섞지 않고 걸쭉하게 걸러진 일명 ‘진땡이 막걸리’이며, 소주인 ‘우주’는 2020년 경기도 농업기술원에서 개발한 증류주 품질향상 기술을 이전받아 술을 만들었다.

이세용·이한빛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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