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서 PC방 사업 중 한국으로 이주
조선소·강판 가공 환풍기 공장 등 취업
발목뼈 수술에도 성실함으로 인정받아
차량정비·건설기계운전 기술훈련 병행
"가족과 함께 사는 날이 행복 완성된 날"

다문화人Story

다문화인 200만 시대다. 주위를 둘러보면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념은 아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중부일보는 이에 대한 간극을 좁히고자 ‘다문화人Story’를 연재한다. ‘다문화人Story’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문화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소개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필리핀 출신 외국인 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 씨. 
필리핀 출신 외국인 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 씨. 

몸 여기저기에 남겨진 흉터는 가장(家長)의 훈장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막노동을 하는 이유는 딱 하나, 가족 때문이다.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Norvin Joy Ledesma) 씨는 한국에 오기 전 PC방을 운영하며 넉넉하진 않지만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삶의 목표는 조금씩 바뀌었다. 딸에게는 더 나은 미래, 더 큰 풍요로움을 선사하고 싶었다. 지난 2014년,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버틴 지 어느새 10년. 처음의 바람처럼 고국에 있는 가족들도 경제적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 그는 한국에 온 게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최근 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자동차 정비, 건설기계 운전 등도 배우기 시작했다. 고국에 돌아가면 활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주말도 반납하고 학업에 매진 중이다. 가장의 이름으로 ‘코리안드림’을 써 내려가고 있는 노빈 씨를 경기도 광주의 한 직업학교에서 만났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뭔가.

필리핀에 있을 때 PC방 사업을 했다. 많이 벌진 못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커갈수록 경제력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러던 중 한국에 가면 필리핀보다 더 벌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PC방 사업을 정리했다.

-일은 어디에서 처음 시작했나.

첫 근무지는 목포에 있는 한 조선소였다. 용접공으로 일했다. 처음엔 일보다는 사람들한테 받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특히 직장 상사들이 일을 시킬 때 목소리가 커지고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져 많이 당황했다. 또 항상 ‘빨리빨리’ 하라며 재촉했는데 이 때문에 부담을 많이 느꼈다.

-외국인이라서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나.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상사들도 내가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니까 요구 사항을 두 번 세 번 이야기 했다. 많이 답답했을 거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으니까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필리핀 출신 외국인 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 씨가 업무 중 당했던 사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필리핀 출신 외국인 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 씨가 업무 중 당했던 사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발목에 큰 흉터가 보인다. 일을 하다가 생긴 건가.

조선소에서 3년 정도 일하다 임금 체불 문제가 생겨 그만뒀다. 이후 강판을 가공해서 환풍기를 만드는 공장에 취업했다. 그러던 중 평소처럼 맡은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판이 내 오른쪽 발목 위로 떨어졌다. 놀란 동료가 구급차를 불렀고 곧바로 병원에 후송됐다. 검사를 해보니 발목 부분의 뼈가 부러져 있었다. 붓기를 가라앉힌 뒤 수술을 했다.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렸을 것 같다.

병원에는 일주일 정도 입원해 있었다. 의사가 회사에 수술 끝났으니까 통원 치료하면 된다는 얘기를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퇴원 이후 회사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지내면서 통원 치료를 받았다.

-회사에서 업무 복귀를 재촉한 건가.

전혀 아니다. 회사에서는 완전히 나을 때까지 쉬라고 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쉬니까 너무 불안했다. 필리핀에 있는 가족이 많이 생각났다. 수입이 없으니까 마냥 치료만 받고 있을 순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손만 이용해서 일할 수 있는 업무를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회사도 내 사정을 듣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업무를 맡겨 줬다. 일을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심신이 지쳤을 텐데. 필리핀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나.

물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해선 한국에 남아 돈을 버는 게 최선이었다. 회사도 내 업무 태도나 능력에 대해 인정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비자가 거의 만료될 즈음 회사는 나를 ‘성실근로자’로 지정했고, 비자 연장이 가능해져 한국에 더 머물 수 있었다. 

-지금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나.

현재는 에어컨 닥트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 왔을 때보다 연봉도 올랐고 생활적인 측면에서도 적응이 어렵지 않아 만족하면서 지내고 있다.

필리핀 출신 외국인 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 씨
필리핀 출신 외국인 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 씨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은데.

딸이 올해 11살 됐다. 많이 보고 싶다. 특히 일이 고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날에는 더 보고 싶다.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여건이 마땅치 않다. 하루 중 가장 큰 낙은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는 거다. 딸 아이의 애교를 볼때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가족들은 한국에서 송금하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나.

그렇다. 한국에서 쓸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면 대부분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낸다. 현재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도 리모델링이 필요하고 아이 교육비, 생활비도 많이 든다. 거의 모든 가정이 그렇겠지만 아내와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돈이다(웃음). 그래도 가족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한국에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인가.

현재 비자 유효기간은 2025년까지이다. 그런데 만약 비자를 더 연장할 수 있다면 한국에 더 오래 머물고 싶고 가족도 데려오고 싶다.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시도는 해봤나.

물론이다. 그런데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과정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지금 비자(E-9: 비전문취업 체류자격)로는 내 맘대로 가족을 데려와 거주하도록 할 수 없다. 가족에게 합법적인 체류 비자를 주기 위해선 회사의 동의를 구하고 관련 서류를 받아 비자 심사 과정에서 제출해야 한다. 2~3년 전에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 가족 초청을 요청한 적 있는데 당시에는 코로나19가 확산되던 때라 여의치 않았다. 조만간 회사에 다시 요청해 보려고 하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필리핀 출신 외국인 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 씨. 
필리핀 출신 외국인 노동자 노빈 조이 레데스마 씨. 

-평일엔 공장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직업 교육도 따로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인력공단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 무료로 직업 교육을 해준다. 지금은 광주에 있는 그린직업전문학교에서 차량 정비와 건설기계운전을 배우고 있다. 나중에 필리핀에 돌아가면 배운 기술을 활용해서 사업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직장도 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열심히 배우는 중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의 ‘코리안드림’은 어디쯤 왔나.

현재 매우 행복하다. 한국에서 일할 기회도 얻었고 가족에게 여유 있는 미래도 약속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나의 코리안드림은 ‘현재 진행형’이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곳이 한국이든 필리핀이든 가족과 함께 모여 사는 그날, 내 코리안드림은 완성될 것이다.

이세용기자

사진=김경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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