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人Story

다문화인 200만 시대다. 주위를 둘러보면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념은 아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중부일보는 이에 대한 간극을 좁히고자 ‘다문화人Story’를 연재한다. ‘다문화人Story’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문화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소개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인천 남동구의 한 다세대 주택 앞. 취재진을 본 미국인 선교사 아이반 갈라르도(40) 씨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내를 받으며 들어선 집안에는 그의 아내 제시카(36) 씨와 8명의 아이들이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여느 집보다 많은 아이들에 놀라 누구냐고 물으니 아이반 씨는 우리 부부가 ‘기적으로 낳은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낯선 취재진을 보고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모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반 씨는 지난 2010년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잘나가던 은행원을 그만두고 선택한 삶이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주위에서 미쳤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는 진정한 행복은 경제적으로 넉넉하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 믿었다. 아이반 씨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선교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미국에서 잘나가는 은행원이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내 명의로 집도 샀고 좋은 차도 끌고 다녔다. 하지만 늘 마음 한편에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통장의 잔고는 두둑하게 쌓였지만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다 26살때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젊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선교 활동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아내가 동의했고 우리는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벌써 1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Q. 그렇게 좋은 직장을 다녔는데, 그만두고 선교 활동을 한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어땠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왜 높은 연봉과 직책을 버리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심지어 몇몇 직장 동료들은 ‘정신이 나간 게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왜 퇴사를 결정하게 됐는지 차근히 얘기해주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설명을 해줘도 여전히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결국 내 삶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나면서 가까웠던 친구들을 보지 못하게 된 건 지금도 많이 아쉽다. 특히 명절이 되면 가족이나 친구들이 더 그립다.

Q.  인천에는 어떻게 정착하게 됐나?
보통 선교 국가를 정할 때 뽑기를 한다. 어느 국가가 나오더라도 기꺼이 가려는 마음이기에 모두 흔쾌히 받아들인다. 뽑기 바구니에서 쪽지 하나를 뽑았는데 대한민국이 적혀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됐다. 처음엔 경남 진주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2년 정도 진주에 머물다가 인천 교구에서 선교사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줘서 이후부터는 인천에 거주하게 됐다. 

Q.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처음 왔을 때 우리 가족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한국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언어가 안되니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다.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깊은 관계를 맺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한국 생활에 익숙해지고 말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게 되면서 그런 문제점들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지금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Q. 혹시 외국인이라서 차별받은 경험은 없었나?
나와 내 가족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에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긍정적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가끔 우리 부부가 8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보고 놀라거나 걱정스러운 이야기들을 해주긴 하지만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다. 우리가 다둥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니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내가 모든 외국인들을 대변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난 13년간 내 경험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들을 위해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Q. 선교사는 급여가 아주 적다고 들었다. 8명의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걱정한다. 심지어 교구에서 주는 약간의 생활비조차 받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잘 먹고 잘사는 게 선교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지금 우리 가족은 가난하지만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Q.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으면 하나?
아내는 12살에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완쾌됐지만 의사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다. 상상할 수 없었던 기적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돈이나 좋은 직업 등에 쫓기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그건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Q. 곧 크리스마스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주한 현실에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감염병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축제를 즐기러 간 수백 명의 젊은이들은 예고도 없이 길거리에서 삶을 마감했다. 한국 사회와 시민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또 많은 한국인들은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순간에도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절대 주변 환경에 좌절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이세용 기자·강승민 인턴기자
사진=강승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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